바울의 기도

 

 

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성도 여러분! 성도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과정에서 큰 두 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필요성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과 구체적인 길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존재할 수 없고,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무대에 발을 디디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은 우리가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고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를 기도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기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의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가정도 다르고, 직장도 다르고, 삶을 살아가는 형편도 다 각각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같이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각 지체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떨어져서 살아가지만,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함께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서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즉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서로 교통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임을 고백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섬깁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서로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는 서로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부정하는 것이요, 각 지체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내가 기도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기도한다라는 표현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이 어쩌다가 한 번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서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를 향한 기도는 바울의 삶에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인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고 고백했습니다(3). 그리고 늘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했습니다(4). 사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라서 육신으로는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빌립보 교회를 자신의 가슴 속에 항상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과 빌립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 기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록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지만,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바울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9절에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를 향한 바울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저들에게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γάπη)”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께 의존된 사랑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타인이 내게 유익을 주지 않아도 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오직 타인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나열하면서 가장 먼저 사랑의 열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만 빌립보 교회와 성도의 그 사랑이 완전함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교회 안에 이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지적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이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자라가야 하고, 풍성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날마다 깊어져야 하고, 더욱더 풍성해져야 하고,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더 깊어지는 데는 분명한 원동력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그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하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우리의 사랑이 더 풍성해지기를 위해서 우리 자신들도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통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는 지식(知識;πιγνσει)입니다.

여기에서 지식은 우리가 단순히 삶 속에서 얻어지는 지식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다 완전한 것이요, 진보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을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결코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성령의 조명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도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총명(聰明;ασθσει)입니다.

여기에서 총명은 지각적인 통찰력 또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분별력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은 무작정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이 분별력이 없으면 무분별한 헌신을 초래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에는 분별력이 있을 때 더욱 풍성해지고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이 분별력은 자신의 지각과 체험을 통해서 악한 것과 선한 것, 그리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러한 분별력을 통해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식과 총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나타나는 바른 분별력은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백성임을 믿는다면, 우리 안에는 분명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이제 그 사랑을 고백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아직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사랑이 더 풍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이 풍성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그 풍성한 사랑을 나타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10절에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제목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소원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때로는 불이익을 당하고, 때로는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외면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끝까지 예수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언제가 예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서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기 원하기 때문입니다(25:21).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딤후4:8).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천국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영원한 삶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4:10).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날(ες μέραν Χριστο)”은 분명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을 앞세우고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가리킵니다.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오셔서 이 세상에 왔던 모든 사람을 당신의 심판대 앞에 세우시고 그들의 은밀한 것까지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상급으로 주시는 날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거절하고 대적했던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로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선한 것(διαφέρω)”은 문자적으로는 ‘~을 가지고 통과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보다 더 탁월한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탁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일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선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탁월한 것은 세속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도덕적인 기준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세상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더 우선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세상에 더 우월한 도덕적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빛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한 분별하다(δοκιμάζω)”라는 표현은 본래 금속의 순도를 시험하거나 화폐의 진위를 시험하는 것을 나타내는 기술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표현이 대부분 도덕적인 문제나 진리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주의 깊게 조사하다, 시험하다, 모든 조사와 시험을 통해서 순수한 것으로 증명하다,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정하다라는 의미를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국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지극히 선한 것, 곧 복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도 복음을 변질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복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복음에서 떠난 교리를 가지고 교회와 성도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러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전하는 거짓 복음도 더 교묘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엇인 참 복음인지, 거짓 복음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도들은 더 조심해야 합니다. 더 깊은 주의를 기울여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깨달음으로 거짓 복음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분명하게 걸러내고 대적해야 합니다.

 

다음은 진실하여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이는 성도의 도덕적인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실(ελικρινής)”은 문자적으로 해가 비치므로 분명하게 드러난 어떤 것의 확실함을 의미합니다. 즉 어둠으로 인해 흐릿했던 사물이 햇빛이 비침으로 인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모두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흠이 없다. 투명하다, 섞이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의미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순결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허물없이(πρόσκοπος)”는 문자적으로는 넘어지게 하지 않는, 범죄하게 하지 않는, 깨끗한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걸어가는 길에서 어떤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상처를 입지 않고 그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의 삶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걸림돌이 되어 타인을 실족하게 만드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서야 합니다. 흠도 없고 티도 없이 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에 근거한 삶,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복음을 발견하고, 예수를 만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1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이 세 번째 기도 제목은 저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맺어야 하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맺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δικαιοσύνη)”는 문자적으로 올바름, 공정함, 바른 관계라는 뜻인데, 이 표현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등장하는 이 는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가 누구든지 구원을 얻어 의인이 되는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러한 의를 근거로 해서 구원을 받은 성도의 생활 가운데서 나타나는 의로운 삶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삶의 증거, 곧 성화의 증거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의의 열매는 우리의 능력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이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리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열매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고 있을 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함으로 인해 맺어지는 열매이며, 우리의 이웃을 향해 실제적으로 표현되어지는 우리의 고상한 품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그로 인해 맺어지는 삶의 열매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성도의 삶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삶이 아닙니다. 성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드러내야 합니다. 비록 온전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내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본문 11절에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상용구였습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했던 바울이 구약의 성구를 인용해서 빌립보 교회를 향한 자신의 기도를 끝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인정하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총명을 겸비한 사랑의 풍성함으로 지고한 선을 행하며 의의 열매를 맺음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한 하나님께 찬송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시며 최종의 목적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성도 안에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도록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오직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 교회와 성도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