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21. 부활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부활1901)

  본문 : 빌 3:10-12

  제목 : 내가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통하여 사도 바울의 행적을 잘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3차에 걸쳐서 세계로 다니면서 그 복음을 전하였고 그리고 이제 그가 소원한 대로 로마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의 삶은 자유가 없는 감옥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완전한 감옥은 아니고 격리된 집에 가택연금을 당한 삶이었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편지를 써서 교회들에게 보내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설명을 하는 서신중의 한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제 순교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뜻밖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도 더 알고 싶고, 그 부활의 권능도 알고 싶고, 그 고난에 참여함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지가 어언 30여년이 지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복음의 비밀을 직접 받아서 알게 되었고, 그가 알고 있는 복음의 비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고 많은 글을 써서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뭘 더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참 이상하게 보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더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 더 알고 싶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가 더 알고 싶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를 설교 제목으로 삼고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본문 1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특별히 복음의 진리를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 읽기를 싫어하고 성경공부하기 싫어하고 설교 듣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조금 알았던 알량한 성경지식 가지고 평생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신학교에서 배운 그 지식 가지고 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연구도 하지 않고 목회를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뭘 안다고 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알거나 잘 못 알거나 심지어는 복음과 반대로 성경을 알면서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이 복음의 진리를 더 알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더 배우고 더 알아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알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싶다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그동안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들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이 여기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여기 지식을 단순히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운전을 할 줄 안다고 할 때 먼저 운전에 필요한 법규들을 알고 차를 움직이는 방법을 습득하고 면허 시험을 치룹니다. 면허시험에 합격하여 면허증을 받았다고 해서 운전할 줄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면허증을 받아놓고도 차가 없어서 운전을 하지 않거나 두려워서 운전을 하지 않는 장롱면허도 많이 있습니다. 운전을 할 줄 알기를 원한다고 할 때 직접 차를 몰고 나가서 능숙하게 잘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실지로 운전을 체험해서 능숙하게 잘 할 때 운전 할 줄 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알고자 한다고 할 때 그런 체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체험하고 예수님의 부활이나 고난을 통한 축복들이 자신의 삶 속에 연결이 되고 자신도 그런 삶을 더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서로 안다는 것은 서로의 교제가 더 깊이 더 친밀하게 되는 것을 말하듯이 예수님과 더 친밀해지고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여

 

  오늘 본문 바로 앞의 9절 말씀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할 구주가 되심을 아는 것이 너무나 너무나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왔던 구원의 방법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바울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너무나 귀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믿기만 한다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 믿고 못 믿어서 그렇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기만 하면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거나 이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고귀한 지식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2)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활을 잘 몰라서 부활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권능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권능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지고 가심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다 깨끗하여졌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다고 한 것은 부활의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연결되는 것임을 알았으니까 이 세상을 살면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 더 잘 살고 이 세상에서 더 화려하게 살고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 비록 어려움을 당하고 화려하게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잠시의 고난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부활을 위하여 심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히11:35)라고 했습니다. 

  부활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부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떤 위협이나 어떤 심한 고문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3)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수록 천국에서 받는 영광이 더 빛날 것이며 그 영광은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너무나 엄청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좀 잘 살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하고 재미있게 살면서 신앙생활도 잘 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사업이 잘 되면 바빠서 교회에 잘 못나오고 돈이 많으면 돈 쓸 일이 많아서 교회에 잘 못나옵니다. 돈이 많아서 잘 먹고 잘 살면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가난하게 사는 것을 더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하면서 신앙생활 더 잘할 것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가난 때문에 또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고 신앙생활하기에 너무 불편하니까 일부러 가난해지려고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왕 가난해지셨으면 그 가난이 우리를 천국으로 부활로 인도하는 너무나 귀한 것임을 알고 감사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난을 통하여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고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0하-11절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부활만 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갔다고 온 사람입니다. 부활하셔서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천국의 그 화려함도 다 보고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했습니다.

  여기 본받는다는 말은 연합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은 자가 되면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함께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으심으로 믿으면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자신은 부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죽는다고 해도 다 부활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의 죽음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즐기기를 원하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런 죄 가운데 있지 않고 죄에 대하여 산 사람으로 죄를 거부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죄를 지을 일이 있어도 단호하게 뿌리치고 삽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고 해도 아무리 그럴듯하게 유혹을 한다고 해도 복음을 믿는 이 믿음은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아니고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에 유혹을 당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죄에 대항하여 이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월 가는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내려가는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산 사람입니다.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에베소서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택함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사도 바울은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너무나 확실하고 부활도 확실한 것이지만 그냥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는 우리의 의무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선택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도 계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복음의 진리를 알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것은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믿음을 위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따라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만 그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은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세상 끝까지 우리가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미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머리로서만 알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함으로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이 너무나 엄청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이 체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답게 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이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부활을 지식으로만 알지 말고 삶속에 실천하고 체험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위해서 믿음생활 끝까지 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