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48)

  본문 : 행 21:35-40

  제목 :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7.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폴 존슨이라는 영국의 유명 언론인이자 역사학자가 쓴 “지식인의 두 얼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유명한 지식인들의 감쳐진 좋지 않은 뒷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아주 그럴듯하고 훌륭한 철학이나 이론들의 글을 발표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유명한 사람들이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주장이나 그들이 쓴 글과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동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론을 만든 루소라는 사람은 아이를 키울 때 교육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식들을 고아원에 내다버렸다고 합니다. 

  노동자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마르크스는 그의 가정부를 45년간이나 월급도 주지 않고 착취하였다고 합니다.

  사회운동가요 소설가인 톨스토이는 사창가를 드나들고 멋진 저택에서 화려한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병적일 정도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한척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행세하고 다니지만 그의 삶을 살펴보면 나쁜 일도 많이 하고 삽니다. 특별히 유명한 사람일수록 똑똑한 지식인일수록 나쁜 짓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도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사람들 앞에서는 착하고 멋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뒤에서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 같아서, 뭔가 좀 더 많이 알면 남을 더 잘 속이고 좀 더 많이 가지면, 나쁜 짓도 더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타락한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락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인간들의 이론이나 철학처럼 거짓되거나 이중적이지 않고 진실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인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왕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함에 있어서도 그들이 잘한 점도 기록을 하지만 잘못한 것들까지도 그대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이나 허위가 아닌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기준으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도 인간들의 그런 위선적인 행동이나 거짓고백이 아니라 진실 된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선행을 좋아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런 위선보다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을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는 진실 된 고백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은 우리 기독교가 무엇을 중심으로 어떻게 전 세계로 펴져나가고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유대인들의 지도자들과 기독교의 지도자인 사도들이 무엇을 가지고 서로 대항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 제사를 드리고, 할례를 행하고 관습을 따라 사는, 이런 행위에 중점을 둡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뜻을 따라서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선한 척 의로운 척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은 그들이 예수님께 듣고 배운 진리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일평생을 온갖 고생을 하면서 핍박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희생과 헌신으로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부 잘못된 교회의 지도자들도 자기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인간의 선행이나 충성을 더 많이 가르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본인 스스로는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본문 35-37절에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7.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기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도바울은 성전에서 반대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율법이나 할례나 성전에서의 제사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고 외치고 다니는 바울이 얄미워서 만나면 제거하려고 했는데 그가 성전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유대인을 배반한 바울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함께 이 사람을 성전 밖에 끌고 나가서 죽여 버려야 한다고 외치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소동의 소식을 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현장에 달려와서 사태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그들에게서 분리하고 쇠사슬을 채우고 병영 안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며 따라오고 있습니다. 바울을 없애버려라 바울을 죽여 버려라 하고 외치면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겨우 바울을 그들에게서 데리고 나와서 병영 안으로 들어가려고 계단을 오르는데 군중들이 바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따라오기 때문에 군인들이 바울을 높이 쳐들고 계단을 올라야 했습니다. 겨우 계단을 올라온 사도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야기 합니다. 나 당신에게 이야기 좀 해도 되는가? 라고 했더니 천부장이 바울에게 네가 헬라어를 할 줄 아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에게 네가 헬라어를 아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바울의 지식 상태를 물어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그냥 나쁜 짓이나 하다가 도망 다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인가를 물어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헬라어는 오늘날의 영어처럼 세계적인 언어였습니다. 헬라는 그리스를 말하는데 지금은 소아시아 터키의 건너편 유럽의 초입에 있는 나라지만 여러분이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는 유럽과 소아시아 애굽 그리고 인도까지 점령한 패권 국가였습니다. 그들은 점령지마다 헬라의 문화와 언어 종교를 전했기 때문에 바울 당시 헬라가 망하고 로마가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도 헬라문화와 헬라어는 세계적인 언어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복음이 잘 전파 되도록 정지작업을 미리 하셨습니다. 그 일 중에 하나가 알렉산더 대왕을 통하여 문화를 통일하고 언어를 통일하는 일이었습니다. 헬라어가 세계 공통어가 되게 하시고 그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헬라어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통하여 정치를 통일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게 하신 것은 모든 나라들이 로마의 속국이 되게 하심으로 전도자들이 마음대로 세계로 다닐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에서 전 세계로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하신 다음에 그 때를 맞추어서 “때가 차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위해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로마 시민권자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세계적인 언어인 헬라어와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다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하셨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바울 같은 사람도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런저런 준비를 다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준비된 지식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다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인이 되게 하셨으며 헬라어로 신약의 절반이상을 기록하도록 헬라어를 잘 아는 지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안일을 위해서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거짓말이나 하고 남이나 속이는 그런 두 얼굴의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그 지식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였으며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이 핵심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알게 해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과 같은 정직한 지식인이 자기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목숨을 바치면서 이 복음을 전하려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보기 때문입니다.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킨 애굽인이 아니냐

 

  본문 38절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쫓기는 것을 보고 그저 나쁜 짓을 한 힘없는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말을 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천부장에게 언뜻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애굽 사람이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다가 도망간 사건이 있었는데 바울보고 네가 그 애굽 사람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혹은 자기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을 모으고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5장에 드다나 유다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행5:36-37)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온갖 환자들을 고치면서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때 유대교 지도자들이 제자들을 잡아와서 감옥에 가두려고 할 때에 가말리엘이라는 유대교 율법 교사가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제자들을 놓아주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키다가 도망간 애굽인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어떻게 혁명을 일으켰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 많은 사건들 중에 하나였고 혹시 바울이 그 애굽인이 아닌가 하고 물어본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하는 과정은 과히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배웠던 율법이나 제사나 할례나 모든 관습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따른다는 것은 혁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세상 사람들이 일으켰던 그런 혁명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들은 다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 혁명도 결국은 자신과 그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민주주의로의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또한 독재자가 되고 그 독재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들과 자기들을 추종하는 주동 세력들만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혁명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또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하나같이 고난을 당하고 대부분 순교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중세시대에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많은 개혁자들도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서 성도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고 천국까지 바로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른 목회자요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본문 39-40절에 “39.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어를 한다고 하니까 천부장이 애굽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은 유대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시골사람이 아니고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2장에 들어가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자세히 사도 바울의 출생이나 자란 배경이나 그가 겪은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가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천부장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는 지리적으로 동서를 연결하는 무역도시였습니다. 무역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렸던 도시이며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아주 유명하고 잘 사는 도시에서 태어났고 또 많은 학문을 접할 수 있는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히브리어란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언어가 된 아람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당시의 이방인들의 언어인 헬라어도 능통했고 유대인들이 쓰는 아람어도 능통했으며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식인이었고 혁명가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나라의 성도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은 온갖 수모를 당하며 목숨까지 그 일을 위해서 바친 순교자였습니다.

 

  그런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오늘 우리도 이렇게 복음을 전해 듣게 되고 그 복음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 상속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그럴듯한 말들을 하여 우리들을 현혹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은 그 말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우리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며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말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은 못한다고 해도 주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