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1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44)

  본문 : 행 21:7-14

  제목 :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7.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냥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별 의미 없이 사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특별한 일을 좋아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일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일에 장인이 되고 인간문화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사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고,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잘 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삽니다.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겠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고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도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도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최고로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최고의 일이며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런 고백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너무나 귀한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은 너무나 고귀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일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빌립의 집에 가서 머무르니라.

 

  본문 7-9절에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두로를 떠난 바울 일행이 역시 배를 타고 내려와서 돌레마이에 이르러 하루를 지내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돌레마이나 가이사랴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들입니다. 두로에서 육로로 올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좀 더 편리한 배를 타고 가이사랴까지 온 것으로 보입니다. 돌레마이나 가이사랴에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가운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이사랴에는 빌립이라는 사람과 그의 가족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여러 명 등장하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과 예루살렘교회에서 집사로 안수를 받았던 빌립집사 이 두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은 사도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고 이 빌립 집사가 지금은 전도자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 교회에 있을 때는 집사로 임직을 받아서 집사로 봉사를 했지만 그 후에 전도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자라고 하니까 요즈음의 전도사로 생각하여서 목사를 도와서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전도자는 오늘날 전도사와 다릅니다. 목사는 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전도자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날의 선교사나 순회 목사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목사 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실제로 빌립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해서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지방으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립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합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이미 혼혈족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곳이었지만 빌립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에서 머무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광야로 나아가서 저 이방인 이디오피아의 여왕 간디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가이샤라까지 와서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는 그의 네 딸과 같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네 딸이 결혼도 하지 않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다 완성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믿을 수 있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본문 10-12절에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머물고 있는 가이사랴로 내려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아가보 선지자의 행동입니다. 그냥 말로만 해도 될 것인데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발을 묶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이렇게 묶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선지자들이 가끔은 이런 행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질 것을 예언했습니다.(왕상 11:29-30 참조) 열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유다가 되고 나머지 열 지파가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이런 자신의 행위와 예언을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꾸 반복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놀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막상 가서 그런 험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시는가? 라고 원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을 하고 있는 바울에게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강요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자원을 하여 이런 일을 감당하였을 때 그것이 바울에게 더 큰 충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원해서 하는 것이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은 강제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본문 13-14절 말씀에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감당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만류를 하니까 마음이 상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만류하는 그들도 결국은 성령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고의 적임자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만류를 하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도 바울은 그들의 충정어린 만류에 그 부탁을 들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 할 때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에 가서 결박을 당할 것을 이미 각오하고 있고 그보다 더 나아가서 죽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다 각오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고난의 길을 마다합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까지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길을 가려고 하지 고난의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박을 당하거나 죽음의 길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뜻 있는 사람들은 좁을 길로 가고 고난의 길로 가고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고 외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최저의 삶을 살면서 이 세상이 나그네 길이며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고 그 천국을 향하여 간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고난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고난이 고난을 위한 고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고난 자체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그 자체만 가지고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보다 더 흉악한 벌을 받아야 만하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을 사람이 죽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고난 자체를 평가절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왜 고난을 당하느냐 무엇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 예수님의 이름이란 어떤 이름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말할 때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이기에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다고 당당하게 말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13:1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다 행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운 말씀 가운데 가장 신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들라고 하면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일일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외쳤더니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서서 걸으며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고 목숨을 버린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서 응답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일도 아주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자 했던 예수님의 이름은 그런 정도의 뜻을 가진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시면서 그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구체적인 뜻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고 그 이름을 힘입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이름이 엄청난 이름이요 그 이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이름이요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후일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잘못을 알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던 거짓선생들이 똑바로 살자고 외치던 교만한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자고 외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외치던 어리석은 목회자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던 많은 목사들이 복음에다가 온갖 잡탕을 섞어서 그것을 설교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장사치 같이 잘못된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산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기뻐 춤을 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고 기뻐 뛰며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 이름이며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여도 죽임을 당하여도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그 이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그 이름을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