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4.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43)

  본문 : 행 21:1-6

  제목 :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1.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중요한 일이 우리 눈에 잘 보이도록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충만하게 하시고 특별하게 역사를 진행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실 구원을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진행하게 하시고 그 일이 완성될 때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일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사도행전은 그 일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수천 년 동안 이 일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시고 다윗 왕을 시작으로 왕정을 이루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 다윗왕의 왕위를 이어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오시게 하셨는데 그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께서 구약시대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일에도 관여를 하셨고 예수님께서 잉태 되시는 일이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모든 일에 관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세상에 전파되는 모든 일에도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셨습니다.

 

  때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충만하게 때로는 보통으로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게 하는 일까지 이 모든 일들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이별을 한 후에 배를 타고 여러 도시들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살펴보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본문 1-3절에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도시들은 대부분 지중해의 섬이나 연안의 도시들입니다. 고스, 로도, 바다랴, 베니게, 구브로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남쪽 도시인 밀레도 항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지나온 섬들입니다. 

  구브로는 지금의 키프러스(Cyprus)라는 지중해의 큰 섬인데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처음 배를 타고 건너와서 선교한 최초의 선교지입니다. 구브로에는 항구에 배가 입항한 것은 아니고 구브로를 왼쪽에 두고 보면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수리아와 바울 일행이 내린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입니다. 두로 항구에서 내릴 때는 예루살렘까지 24km 정도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마도 육지로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비교적 세심하게 사도 바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만 보아도 기록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그냥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만 기록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어디 어디로 진행을 했는지를 자세히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런 일들까지 기록을 했을까요? 사도 바울 일행이 밀레도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만 기록을 해도 될 일을 일일이 기록을 했을까요?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 사실대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 미루어 보아서 사도행전이나 모든 성경의 기록들이 어떤 개인이 쓴 소설이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섬과 도시들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도시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지명과 인명들은 실제로 있었던 도시들이고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들입니다. 가끔은 성경에 기록된 지명들이 현존하지 않아서 의아해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지명들도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존재했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로 미루어 보아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도 실제로 있었던 장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함으로 성경이 사실의 기록이며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교훈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이 특별한 경우에는 기적적인 방법을 동원하시지만 보통은 보편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시면서 축지법을 쓰거나 구름을 타고 가게 하시거나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가는 방법으로 가는 통로를 통하여 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보편적인 일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가야하는 목적지에 갈수가 없게 되거나 가다가 큰 사고를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이런 것을 말씀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는 삶이 복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는데 그 동행하심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삶 속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나거나 왕창 망했다가 회복이 되거나 흉악한 죄의 길에서 기적적으로 새 사람이 되거나 이런 특별한 일에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거나 우리가 특별히 느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보편적인 삶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면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역사하시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더 보람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기적적인 방법이나 보편적인 삶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에서는 최선의 삶을 살게 해 주시고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고 계심을 인식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시도록 맡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내 욕심 내생각대로 하지 마시고 성령님을 뜻을 따르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4절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두로에 상륙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두로라는 도시에 어떻게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마도 스데반이 순교하고 기독교가 박해를 당할 때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가라고 역사가들이 추측을 합니다. 혹은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열두제자나 특별한 일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제자도 특별한 훈련을 받거나 특별한 사명을 받아서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삶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제자라고 합니다.

 

  바울 일행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일주일동안을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일주일동안을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복음을 다시 한 번 가르쳤을 것입니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그 일주일동안이 꿈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한두 번 듣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귀한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확신이 없었던 사람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복음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확신이 없었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들이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설교를 듣고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자세히 배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들어도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하실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시면서 내가 참 귀한 것을 가지게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말로 큰 은혜를 베푸셨구나 하는 것을 가슴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설교에서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4절 말씀에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했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일주일 동안 사도 바울의 설교를 잘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두로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자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그냥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잘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가는 것이었고 성령님의 특별하신 인도하심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이 만류를 한다고 생각하면 사도바울에게 임하신 성령님과 두로의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다른 분이신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감동하셨을 때도 사도 바울에게 감동하신 성령님과 동일하신 분이시고 동일한 뜻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는 자신이 고생을 하는 길이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았을 때는 역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역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죽음의 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로의 제자들은 사도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만류애도 불구하고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도 바울을 죽음의 길로 보내야 하는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성경에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단어들이 나옵니다.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란 성령님께서 임재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 받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인해서 성도들이 감동을 받거나 강건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전적으로 그 역사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특별히 부여되는 예언이나, 방언이나, 신유 등의 은사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부여되는 가르침이나, 구제나, 다스림이나, 사랑 등의 은사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란 성령 충만한 삶을 삶으로서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성품들을 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을 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수록 우리의 성품 이렇게 변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성령님의 역사에 있어서도 같은 한분 성령님이 역사하시지만 사람에 따라 사안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성령의 충만도 각 사람에 따라 다르고 받은 은사들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들도 다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충만한 삶을 사시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들을 잘 활용하여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삶에서 성품에서 아름다운 열매들을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본문 5-6절 말씀에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다 만날 때는 기쁘지만 헤어질 때는 섭섭합니다.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란 늘 슬프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과의 만나는 사람들이 늘 그랬습니다. 만날 때는 너무 반갑고 기뻤지만 헤어질 때는 늘 슬픈 마음이었습니다.

 

  지난번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헤어질 때도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이별을 슬퍼했습니다. 오늘 두로의 제자들과의 만남도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의 만남이었지만 헤어지는 것은 매우 큰 슬픔이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처자식들을 데리고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서 환송을 하고 바닷가의 항구까지 나와서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 서로 작별을 했습니다.

 

  오늘 설교가 성령님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설교였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주제로 볼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낼 뿐만 아니라 수시로 무시로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힘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교회를 위해서 충성할 수 있고, 기도할 때 선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주제로 말씀 드렸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고 했습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늘 수시로 기도하면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에 강하게 역사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많이 맺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