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1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42)

  본문 : 행 20:36-38

  제목 :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니.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마지막으로 간절한 설교를 하는 장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짧은 한편의 설교였지만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설교에서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복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설교였기 때문에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21)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되심을 믿는 믿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믿음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고백함으로서 우리가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씀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이런 귀한 일을 함에 있어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자신과 동행들이 쓸 것을 충당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익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복음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강조함으로서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을 받는 일에 우리의 노력이 조금도 필요가 없게 해주셨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하는 힘든 과정을 없애주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 안에 한 형제 된 성도들을 위해서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설교를 다 마친 후에 사도바울과 장로들이 함께 기도하며 눈물로 이별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니”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본문 36절에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라고 했습니다.

 

1) 설교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설교를 끝낸 후에 기도로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만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설교에 함께 하실 때만 전하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고 듣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 없이 준비하는 설교도 잘못된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 없이 준비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잘못된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머리로 자기의 지식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 인간의 뜻을 전하기 쉽기 때문에 철저하게 기도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지 않는 많은 설교들이 기도에서 나온 하나님의 뜻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설교가 많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기도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할 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그 말씀에 은혜와 믿음이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재미로 듣기 좋은 말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도록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기도의 형식도 중요합니다.

 

  흔히 기도는 기도의 형식이나 내용보다는 얼마만큼 질실 되게 기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이 옳은 말씀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기도의 형식도 중요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하는 이런 형식들도 중요합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기도의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유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지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의 정신이 깊이 박혀 있어서 얌전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또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기뻐도 기쁘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하는 것이 유교의 정신이고 양반들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찬송을 부를 때 얌전하게 조용하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을 들거나 박수를 치거나 감정을 나타내서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드는 것과 같은 외적인 행동들이 온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온 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에 이런 외형적인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익은 이러한 외적인 상징들의 도움을 받을 때에 우리의 나태함을 일깨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행동이 없이 조용하게 마음만 가지고 기도를 하거나 예배를 드릴 때 나름대로 의미도 있겠지만 때로는 육체적으로 나태함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귀찮다는 듯이 나태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온 몸으로 기도하고 온몸으로 예배를 드릴 때 이러한 나태한 모습에서 벗어나서 열심히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예배드리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최고의 것을 드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지 않는 무성의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저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지만 자주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새벽기도회나 수요기도회나 금요기도회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은 예배는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번을 드려도 최선을 다해서 드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낮 예배 한번을 드려도 그 한번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데에 마음을 두면 안 됩니다. 집중하여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손뼉을 치고 일어나서 춤을 추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서 최고의 것을 드려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세 번째 유익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외적인 상징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온몸을 다 사용하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 자신의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중요한 행동이 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만 믿는다고 얌전하게 앉아 있으면 그가 믿음이 있는 것인지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 몸을 다해서 신앙을 고백하면 진정한 고백이 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창피합니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아직도 자신이 가진 믿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온몸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뜨거운 마음과 몸짓으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성도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그날까지 우리가 먼저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손도 드시고 무릎도 꿇으시고 일어나 뛰기도 하면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7절-38절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설교가 다 끝이 나고 이제 정말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정말로 안타깝고 아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크게 울고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헤어지는 아쉬움을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이제 사도바울을 마지막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죽음의 길로 보내는 마지막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 서글픔이 컷을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있는 최고의 보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는 척 하다가도 마지막이 되면 본심을 드러내고 감추었던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고 참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이 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6-18)라고 하셨습니다.

 

  나무만 볼 때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가시나무일 때 그 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 나무가 엉겅퀴 나무일 때 그 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그 열매를 보아야 그가 정말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착한 사람인척 좋은 일 하는 사람인척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인척 좋은 사람인척 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정말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정말로 위대한 것이며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도 바라지도 않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많은 교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사도바울의 모습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들로 유혹을 하고 이런저런 즐거운 프로그램으로 재미있게 하지만 그들에게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없는 곳에는 영생의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이 없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일 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 중요한 것이 없는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설교 자 중 한 사람인 A. W. 토저가 남긴 10가지 명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만약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을 뺀다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95%가 계속될 것이고 아무도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신약 교회에서 성령을 뺀다면, 그들이 행했던 일의 95%는 멈췄을 것이고 모두 그 차이를 알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것이 오늘날의 교회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님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들이 행한 일들의 95%가 멈췄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성령님의 역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는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는 인간들 마음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교회들이 교회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차이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열매가 없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믿음보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인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허상일 뿐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가르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도바울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에베소교회 장로들과의 이별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이별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이 복음의 열매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후의 열매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