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35)

  본문 : 행 20:17-21

  제목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에 때로는 망설이기도 하고 때로는 재촉하기도 하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봅니다.

 

  인간적으로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동안 정든 사람들과 이별을 하고 멀리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른 계시가 있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또 혼자 걸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기도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거기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도 가기 전에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앗소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 앞바다를 지나서 밀레도로 바로 온 것은 에베소에 가면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되고 지체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육로가 아닌 배로 밀레도까지 바로 왔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밀레도에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저런 부탁을 하는 것이 오늘 본문 17절에서부터 마지막 35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부터 35절까지를 바울이 밀레도에서 행한 마지막 설교라고 합니다.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유언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8절에서 21절까지로 여기서는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사역하였는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둘째부분은 22절에서 24절까지로 사도 바울의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셋째부분은 25절에서 31절까지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후에 있을 자신의 순교와 그리고 그 후에 교회에 침투할 이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2절에서 끝 절까지는 축복과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부분인 사도바울이 과거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한 행동과 자신이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본문 17-19절에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그 복음을 전하는 것만 하여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입술로 복음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음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에게 자신이 에베소에서 3년간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 자신의 모습을 장로들이 다 보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누가 언제 보더라도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바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겸손하게 행동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 살았다면 얼마든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겸손하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도 유대교 지도자로서 대단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처벌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젊었던 시절에 이미 상당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나간다면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그는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위치를 차지하였고 오히려 다른 열두제자들보다 더 큰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직접 받은 복음의 진리는 너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셨습니다.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어떤 병이든지 낫게 할 수 있었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위치라면 이 세상에서도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마음만 먹었으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그들은 기꺼이 많은 것으로 은혜를 갚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이권들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생활비마저도 본인의 힘으로 벌어서 쓰려고 했습니다.

 

  요즘 일부 대교회 목사들이나 특별히 사이비 이단들의 교주들을 보면 엄청나게 교만한 삶을 삽니다. 화려한 주택에 최고급 외제차를 타면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마치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 누리고 삽니다.

 

  “눈물이며”라고 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런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감동으로 흘린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고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들은 틈만 나면 바울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고 그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를 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련을 당했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조금이라도 그들과 타협해서 변질시키지 않았습니다. 복음 그대로를 바르게 끝까지 전하고 고수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가짜였다면 또는 별로 귀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조금씩 바꿔 가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명예와 부도 좀 챙기면서 믿음을 이용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삶을 통해서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 하나님의 복음이며 구원의 복음이며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며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본문 20-21절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그가 겸손하게 또 눈물을 흘리면서 유대인들에게 시련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한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감격적으로 한 일이 무엇인지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익한 것이 무엇이든지... 전하고 가르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전심전력을 다하여 전하고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고 계속한 것은 그가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가 우리들에게 너무나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며 흉악한 죄인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이며 죄 가운데서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착하고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밝은 빛 아래서 진리를 알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고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회개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회개와 믿음은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에는 회개가 동반하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회개를 해야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동반자처럼 함께 합니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은 반드시 분리해서 생각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회개가 곧 믿음일 수 없고 믿음이 없는 회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한다고 해서 회개한 것 자체만 가지고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물론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게 되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똑바로 산다고 해도 그것 자체만 가지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회개하고 완벽한 삶을 산다면 그것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경지에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기 이전보다는 좀 나은 삶을 살겠지만 완전하게 의로운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어느 때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 바른 삶을 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일어난 운동이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그동안 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바르게 살기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심령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운동을 통한 심령부흥운동이 가장 소중한 믿음을 소홀하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회개함으로 자기 자신이 바르게 삶으로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회개나 바른 삶은 구원에 이르는데 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에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성경에는 도처에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의 과녁(목표)으로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사람들이 오르기에는 너무 높아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찾으려는 우리의 지각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그 높은 하나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중보자가 있어야 되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중보자요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본다면 두려움에 질려서 죽어 자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지은 자를 저주하시며 멸하시는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죄인인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두려움에 질려서 죽어 자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얼마나 엄위하신 분인지를 잘 모르고 알면서도 그렇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건방지게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셔서 우리를 생명으로 회복시켜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들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 발견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리스도가 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것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무죄로 만들어 주셨으며, 자신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셨고, 자신의 순종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으며, 자신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로 의롭다함을 얻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복음이 너무나 소중하고 우리에게 너무나 유익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대했다고 했습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기억하시고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