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8.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66)

  본문 : 행 25:22-27

  제목 :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따르는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이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사탄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최고라는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도 섬기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 높은 분들을 섬기지 못합니다. 부모님이나 스승이나 선배나 마땅히 존경하고 따라야 할 사람들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교만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교만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잘난 척하고, 잘 아는 척하고, 똑바로 사는 척하지만 사실은 교만일 뿐이고 못나고 무지하고 추한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세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면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세를 낮추고 살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면 시야가 넓어지고 많은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의 분봉왕인 아그립바가 직접 사도바울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에 중복으로 읽었던 22절에 보면 아그립바가 총독 베스도의 말을 듣고 자신도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그 아그립바 왕의 부탁을 듣고 그 다음날 바울을 불러내어서 아그립바 앞에 세우고 바울의 이야기를 듣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그립바가 바울을 접견하고 이야기를 듣게 되는 그 시작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봉왕 아그립바가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라고 한 말을 설교의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주장을 들어 보고 싶다고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귀한 말을 듣고자 하면서 그 자리에 임한 태도가 문제입니다.

  매우 교만한 모습으로 그 소중한 말을 듣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 중요한 기회에 바울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본문 22-23절에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라고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그의 여동생 버니게가 왜 바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당시에 바울의 재판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주 중요한 재판이었기 때문일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유대인의 왕으로서 유대인과 바울 사이에 벌어진 재판에 대해서 바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는 나라에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이라고 정죄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이 어떤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장하신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신가, 아닌가 하는 것은 아그립바의 헤롯 왕가와 많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시라고 할 때 단순히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신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기들이 어렵게 차지한 왕위를 빼앗겨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대왕 때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는데 그 때 동방박사들이 별을 연구하다가 갑자가 나타난 큰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누구냐고 헤롯에게 물었습니다.

헤롯이 자기가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될 사람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그 시기에 그 부근에 태어난 아기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의 왕위를 탐하는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게 해주셔서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죄명을 ‘유대인의 왕’으로 써서 십자가 위에다가 붙였습니다. 그것을 본 유대인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했지만 빌라도가 거부하고 그냥 ‘유대인의 왕’으로 써 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실 때는 단순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나라로 세운 특별한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아그립바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자기가 지금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는 사람이 정말로 다시 살아났고 지금도 살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알아보려고 하는 아그립바와 그 여동생의 자세는 매우 교만했습니다. 진짜 왕이 누구신지 알아보려는 자세가 아니라 내가 왕인데 누가 감히 왕의 자리를 엿보는가 하는 자세로 그 자리에 나왔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라고 했습니다. 아주 화려하게 폼을 잡고 왕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형적인 폼을 잡는다고 해서 그가 진짜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의 후손도 아니면서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서 어쩌다가 왕 노릇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의 왕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겸손하게 나와서 진짜 왕이 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교만하게 내가 진짜 왕인데 누가 감히 왕이라고 하느냐는 교만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그런 자세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거기다가 머리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것이 아주 아주 귀한 복음이라고 해도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어려서 어디서 잘 못 배운 것이나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믿음의 전부인 줄 알고 진짜 복음을 말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복음을 바르게 알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닌 사람입니다. 그냥 주일을 지키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고 교회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맡아서 하는 것인 믿음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위한 것이며 그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모르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알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벌 받을까봐서 주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좀 적극적으로 복을 받아서 잘 살아보려고 교회 일도 하고 헌신하면서 살았습니다.

  다 안다는 교만함 때문에 모태신앙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정말로 내가 흉악한 죄인이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하고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흉악한 죄인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은 최고의 착한 일은 내가 구원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믿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연약한 교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큰 부자도 없고 크게 출세한 사람도 없다고 연약한 성도라고 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우리교회는 가장 강한 교회 중에 하나이고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강한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날마다 듣고 그 복음으로 무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가장 큰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면 가장 강한 용사가 되고 가장 강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교만해서는 안 되지만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좀 교만해도 됩니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고 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본문 24-25절에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 앞에 바울을 불러 놓고 바울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고발을 하였는데 내가 살펴보니 죽일만한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 죽이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죽이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예수님 때도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고 바울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고 기회만 있으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때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자기들끼리도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서로를 살리는 것이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은 도둑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틈만 있으면 죽이려고 대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 짓이 아니라 사탄이나 그 졸개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남을 나쁘게 만들고 험담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교만 때문에 남들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함 때문에 잘못을 보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지만 복음으로 의로운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칭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더 잘되게 해주려고 서로 애를 쓰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본문 26-27절에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총독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 앞에 바울을 세우고 바울의 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심문하고 답변을 듣고자 한 것은 바울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보입니다.

 

  다만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서 가이사의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바울을 가이사의 법정에 보내면서 바울의 죄목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하여 보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를 통해서 혹시 바울의 죄목을 특정할 수 있을까 하여서 이런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의 최고의 지도자인 왕 앞에서 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바울의 주장 중에 무엇이 죄인지를 살펴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범죄 혐의가 있어야 하고 그 혐의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살인죄라든지 간음죄라든지 법을 어긴 죄가 확실히 있어야 하고 그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했지만 그 죄목도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재판받는 과정을 살펴보았지만 그렇게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죄목을 지정하지 못했습니다. 죄목이 뚜렷이 없으니 증거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죄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미워하고 비판하는 것이 이런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도 뚜렷한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당연한 일을 거부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잘못한 일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한 것이 잘못입니까?

  그 하나님을 몰라본 것이 죄이고 알면서도 그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 당연한 일을 하는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 죄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행실을 똑 바르게 해야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지 예수님만 믿는다고 하면 다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그렇게 시시한 일입니까?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이 잘못된 것입니까?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너무나 감사할 일이고 너무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믿고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살피면서 그 뜻대로 사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성경 전체의 말씀을 통해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죄를,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또 앞으로 세상을 사는 동안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죄들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깨끗하게 용서받게 해주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시는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말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너무나 위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나의 진실한 고백이 되도록 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런 귀한 증언을 듣고도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남을 죽이려고 하는 죄악 된 습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깁니다.

 

  우리도 이런 죄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정말로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를 알고 믿고 따르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