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3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56)

  본문 : 행 23:6-10

  제목 :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을 생각해보면 옛날 조선시대 정승이나 갑부들 보다 엄청 잘 삽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삽니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나 에어컨 같은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고 전화나 자동차 같은 엄청난 것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나타내는 행복지수를 따져봤더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 못사는 방글라데시 사람들보다 낮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나보다도 더 좋은 아파트에서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돈을 많이 벌어서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이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지수가 낮은 또 하나의 이유는 높은 교육열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우파의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진보좌파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같은 사안을 놓고도 어느 한편은 옳다고 하고 어느 한편은 그르다고 하기 때문에 늘 서로 싸웁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용자와 그 기업에서 일을 하는 근로자가 서로가 합심하여 기업이 잘 되게 하여야 하는데 자기 이익을 좀 더 챙기기 위해서 서로 싸우다가 함께 망하기도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음을 합하여 나라가 잘 되도록 해야 되는데 여야로 나뉘어서 당리당략만을 위해서 싸우다가 세월만 보냅니다.

  어디 그런 것뿐입니까? 심지어는 태어난 고향을 두고도 전라도니 경상도니 해서 서로 미워하고 남자와 여자들도 서로 싸우고 젊은이들과 늙은이들도 서로 싸웁니다.

 

  이런 분열과 반목의 역사는 성경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늘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생각이 달라서 그 후예들이 다른 길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과 그 밖의 세상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가야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로 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그 사람들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로 공회에 함께 참석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이 있고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면서도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소를 합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바리새인들에게 호소를 했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의 호응을 받았고 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가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바울이 법정에서 심문을 받는 이유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활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외면을 당합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본문 6절-8절 말씀에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바울이 공회 앞에 나가면서 공회를 주목하였다고 했습니다. 공회에 어떤 사람들이 재판관으로 왔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 이미 공회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바울은 그들의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그들의 교리로 삼는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그것도 어제오늘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 때부터 바리새인이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대강 적당히 바리새인이 되었거나 바리새인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가 아니라 전통적인 바리새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사두개인

 

  복음서에서 사두개인들은 늘 예수님께 혼날 때 바리새인들과 함께 혼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것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을 가르치신다는 소식을 듣고 따지러 왔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법에는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둘째와 세째도 형수와 살았으며 일곱이 다 그렇게 하여 자식 없이 죽었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눅20:28-33, 현대인성경)라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부활의 불합리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도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겠지만 차원이 다른 하나님나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두개인들만 내세를 믿지 않았고 천사나 영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위직을 독차지 했고 유대교의 최고 정치기구인 산헤드린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직책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잘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세는 필요가 없었고 오직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좋아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출입하지만 영원한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을 최고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의 직책을 이용해서 권력을 형성하고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열심히 전도하고 대형교회당을 짓고 좋은 사업들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영원한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천국처럼 꾸미고 천국에서의 삶처럼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영원한 천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좋아합니다.

 

2)바리새인

 

  이런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천사도 믿고 영도 믿고 부활도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내세를 믿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율법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엉터리로 하면서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잘 모르고 겉으로만 지키는 체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따랐으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고신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려파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신행일치를 강조하여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율법을 가지고 이웃을 정죄하고 괴롭히는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키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자신보다 착한 사람을 더 큰 죄인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흉악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갖 죄들을 지었으면서도 한두 가지 잘한 것 가지고 의로운체하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처럼 교만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6절 말씀 중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이 있는 것을 보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서로 싸움을 붙였습니다. 부활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어서 사두개인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바울이 지금 이런 재판을 받는 것은 부활의 문제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의 제사를 무시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서 이런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을 죄로 몰아붙였기 때문이지 그것이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한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서 사형을 시켰는데 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유대인들은 정말로 흉악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구주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병정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고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으로 꾸몄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증언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철저하게 입을 막거나 죽여서 증거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부활의 소식은 점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그 부활로 인해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소식이 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입증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내세도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고 오직 현세의 행복만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도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서 율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행의 능력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보다 더 높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를 해버립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본문 9-10절에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증언하고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을 하자 바리새인들이 바울을 동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고 하면서 바울을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악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말하는 것이 진짜 성령님이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런 바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이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큰 분쟁이 생겼고 잘못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 것을 두려워하여 천부장이 부하들을 명하여 바울을 그들 가운데서 빼앗아서 다시 영내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악한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로 착한 사람입니다. 최고 착한 사람이고 최고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너무나 귀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최고로 선한 사람입니다. 가장 멋있는 사람이요 가장 큰 복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재미있는 일을 말해주는 사람을 최고로 여기고 박수를 칩니다.

 

  저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목사들이 부활의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는 목사라고 한다면 부활보다 더 중요하게 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약에 부활의 복음만 전하다가 나중에 부활이 없으면 자신에게 항의할 것을 대비해서 부활은 그저 생색만 내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을 더 많이 강조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해도 욕먹지 않을 만큼 조금만 언급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맞아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만 믿고 이 세상에서 고생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막상 부활이 없다고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활이 믿어지고 또 성경 말씀이 온통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혹시 만에 하나 부활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 귀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부활이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복이 이 부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에 또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