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50)

  본문 : 행 22:6-11

  제목 :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도 바울이 자신이 지독한 유대교를 따르는 사람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로마병정에게 체포당한채로 유대인들 앞에서 변명하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이며 율법을 정통적으로 배운 사람이며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빌립보서에서 고백한 대로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6-6)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 계가기 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거의 다 갔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둘러 비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배경을 보면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 태어서 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모태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농담으로 모태 신앙을 못된 신앙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태신앙이면 신앙생활도 더 잘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는 깊어서 흔들리지는 않는데 특별히 뜨겁게 신앙생활은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모태신앙은 대체로 개인적인 체험이 없습니다. 부모님 따라 교회에 다녀서 교회에 다니는 것은 당연하게 다니는데 기적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신앙이 미지근합니다. 중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가 있을 것입니다. 죽을병이 걸렸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거나 복음을 듣고 아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나 어떤 체험 때문에 교회를 다닌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신앙생활도 뜨겁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체험이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불붙는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가 믿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기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이미 복음이 잘 알려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더 이상 그런 기적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런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성경에 일어난 기적들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을 결정적으로 변화되게 한 이 사건을 잘 살펴보면서 바울이 체험했던 기적을 여러분의 체험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본문 6-8절 말씀에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메섹에 거의 다 와 가는데 오정쯤 되어서 하늘로부터 큰 빛이 둘러 비쳤다고 했습니다. 그 빛 때문에 바울이 땅에 엎드러졌는데 그 때 하늘로 부터 소리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라고 했습니다.

  낮 12시쯤 되면 태양이 제일 빛나는 시간입니다. 태양이 제일 빛을 발하는 시간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비쳤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본 일이 없는 아주 강한 빛이 비췄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에게 보이실 때는 그 일이 사람이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심으로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기적 속에 어떤 의미를 포함시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기도 합니다.

 

  여기 큰 빛이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강한 빛으로 빛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바로 깨닫게 하십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태양보다 더 강한 빛을 인간들이 만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빛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 더 큰 엄청난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동안 바울은 자신이 모든 것을 잘 아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문화가 발달된 도시에서 태어났고 머리가 좋기로 유명한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가장 잘 알려진 유명한 스승에게서 전통적인 율법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도 하고 당당하게 체포하러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환한 빛을 보는 순간 그는 땅에 엎드려졌다고 했습니다. 빛이 너무나 밝기 때문에 엎드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교만한 자아가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이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매우 교만하게 삽니다. 자기가 잘난 척하고 자기가 아는 것이 많은 척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번 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한번 서 보시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인간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보잘 것 없는 지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주에 널려 있는 수많은 지식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티끌 하나도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알량한 지식으로 잘난 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제일 크고 중요한 지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조금 배운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커져가기를 바랍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히브리식으로 유대교에 있을 때 부른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부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실 때 “사울아 사울아” 하고 두 번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실 때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그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번 부르실 때는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실 때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울을 두 번 부르시는 것도 사울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르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꾸짖음 속에는 사울의 무지함을 책망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인 나를 핍박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네가 성경의 율법을 그렇게 전통적으로 배웠다고 하면서 그 율법의 핵심이 되는 나를 박해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에 그렇게 열심을 낸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들에게도 이런 꾸짖음을 하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는 선민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수백 독을 했다고 하면서 율법을 잘 알고 지킨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천국에 가야 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요 율법의 목적지가 복음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고 선교를 하고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학교를 운영하고 이런저런 거창한 사업들을 많이 하면서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을 말하기는 하는데 저 한쪽 구석에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버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박해까지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박대를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문전박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노회 일을 하면서 많은 목사님들을 만납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주 반갑게 맞이해주시고 귀하게 여겨줍니다. 어떤 목사님은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귀찮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 한 잔 나눌 시간도 아까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큰 교회의 목사이거나 돈이 많거나 특별한 사람이라면 반갑게 맞이해줄 텐데 작은 교회 힘없는 목사라서 그런가 하고 좀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아주 반갑게 대해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를 흘리기까지 우리를 위해주셨는데 우리는 그 은혜를 너무 값없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12:8-9)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 부인하면 예수님도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박해하거나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박해하시거나 귀하게 여겨주지 않으셔서 우리는 정말로 불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내 어디 가리까”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무정하신 분은 아니시지만 그래도 주님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말씀을 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귀한 분으로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믿는 이 위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본문 9-11절 말씀에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기적을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은 그 기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기적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행과 함께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메섹에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끌고 오려고 했기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빛을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바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만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기는 합니다.

 

  바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이 빛은 보았는데 그 빛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어떤 의미로 비추는 빛인지는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가 의미하는 뜻을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로만 들었지 그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주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기적을 통해 주신 말씀을 알아듣고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반응했습니다.

 

  용서해서 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박해한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할 죄이요 죽음을 당해야 당연한 그런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를 용서받는 것은 그에게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이런 말이 먼저 나왔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삶속에서 이런 기적적인 일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임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우리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많이 임합니다.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런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나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늘 주님께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제가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일까요? 늘 그런 질문을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유대교의 열심당원으로 있다가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 사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한 빛으로 임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응답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기적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도 각각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늘 주님 앞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