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78)

  본문 : 행 28:16-22

  제목 :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서 피고인의 신분으로 2년 동안 지나게 됩니다. 나중에 로마당국이 기소조차 하지 않아서 자유의 몸이 되는데 그 기다리는 기간이 2년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이 로마에서의 활동을 이렇게 피고인의 몸이 되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하면서 그 복음전파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자신이 머무는 처소로 초청을 하여 복음을 전하기 전에 자신이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이렇게 쇠사슬에 매인 바 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라고 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본문 16~17절에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왔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감옥에 가두어두지 않고 죄수의 몸으로는 특별히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었습니다. 감옥이 아닌 개인 집에 머물게 해주었고 군인 한 사람만 배치해서 감독하게 하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사도바울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백부장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또 로마당국은 이미 바울을 죄인이 아니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죄인으로 재판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을 하셨습니다.

 

  바울 주변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작정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손에서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죄수의 몸이 되게 하고 로마 군인들이 지키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까지 바울을 침투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와서 먼저 한 일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을 자기가 있는 처소로 초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유대인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해명을 했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반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교를 따르지 않고 이단을 만들어서 유대인들을 미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여 그렇게 오해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인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고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아가서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가르쳤습니다.

 

  또 바울은 자신이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에 기록된 율법들을 잘 지키고 살기 위해서 여러 관습을 만들어서 그 관습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율법을 파괴하거나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바르게 알고 그 율법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율법의 핵심인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믿음을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런 오해들을 받습니다. 율법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게 한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답게 사는 삶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에서 구원이고 이 구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하여서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율법을 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의 일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본문 18~19절에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죽이려고 하자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해서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왔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바울을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대로 바울이 여러 번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로마인의 재판정에서는 바울의 죄를 찾지 못하고 무죄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로마군의 천부장이 달려가서 죽이지 못하게 하고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서 거기서 정식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을 배석시키고 바울을 재판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천부장이 바울을 총독에게 보내면서 판결에 대해서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행 23:28-29)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고발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니까 한 가지도 바울을 죽이거나 결박을 할 만한 사유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단지 율법의 해석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다를 뿐이지 그로 인해서 죄를 물을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총독인 베릭스가 재판을 하였고 후임으로 온 베스도 총독에게도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총독 역시 바울에게서 사형을 당할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행24:25)

  베스도 총독이 볼 때 바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 분봉 왕인 아그립바도 바울의 주장을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야기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행 26: 30-31)라고 했습니다.

 

  로마당국은 계속해서 바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해서 처벌할 수 없다고 했지만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심지어 로마당국이 무죄로 석방하면 그때를 이용해서 죽일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고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바울이 어쩔 수 없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고발하고자 함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방어행위였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나라를 ‘고발 공화국’이라고 했습니다. 어찌나 고발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 고발을 하고 법정으로 가서 재판을 받으려고 합니다.

 

  고발하고 재판받는 것으로 부족해서 사람들과 합세해서 시위를 합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고 손해가 온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이익도 존중해 주고 조금 희생할 생각을 가지면 참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인데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도 크고 작은 많은 분쟁이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간에 상도와 성도 간에 많은 분쟁이 있어서 해결이 안 되면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교회 안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니까 창피하게 세상 법정에 고발하여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양보하거나 타협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고 지켜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의 분쟁은 그런 진리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 때문에 이권 때문에 윤리 도덕 때문에 싸웁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 성도 간에 분쟁이 있을 때 세상 법정에 고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살펴보고 잘못된 것은 사과하고 또 용서할 것은 용서해야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사람들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 사이에는 서로의 잘못을 보기보다는 서로 좋은 점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들에게는 좋은 점들과 나쁜 점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나쁜 점은 못 본 척 용서해줄 줄 알고 좋은 점은 찾아서 칭찬해줄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본문 20절~22절에 “20.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한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이런저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 오해를 풀어주기 위함이며 자신이 이렇게 죄수의 몸이 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시작하실 때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시작하셨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고 정말로 인간이 살아야 하는 도리를 알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려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시작하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지도 않았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드렸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보다 그 제물에 마음을 두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만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체하는 위선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받을 것은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에 세상 나라에 침략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으로 인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렘 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나라의 소망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소망이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에게도 소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소망이 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소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절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버리고 그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외면한 그 소망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렇게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들이 이 소망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의 소망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행복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유일한 복음인데 이 복음의 길을 따르지 않고 외면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 복음을 외치지 않으니까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이 진리인 것으로 그것이 복음인 것으로 착각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인 예수님을 그리스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목적이 되는 유일한 소망을 버리고 딴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가 또 바울처럼 쇠사슬에 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고발을 당하더라도 사형을 시켜야 하는 죄수라고 욕을 먹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공부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막중한 사명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통한 참된 소망의 길을 따를 때까지 미약한 힘이지만 복음을 외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복음을 향한 여정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복음은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된 소망 영원한 소망이 되는 너무나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한번 외치고 믿고 따르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