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74)

  본문 : 행 27:27-37

  제목 :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27.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자기 생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성경을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를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글이 아니고 그 기자 뒤에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손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서 그 기자가 살아가는 역사를 움직이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기자의 손을 통해서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성령 하나님께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도 의사였던 누가라는 사람에 의해서 기록했지만, 그의 뒤에는 성령님께서 계셔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심지어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간섭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의 기록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그냥 단순히 사도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로마에까지 가는 여정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기록 속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말로 귀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모든 삶을 포기하고 죽음의 위기들을 수없이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전해야 하는 귀한 것이 복음입니다.

  또 이 복음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결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성경을 대하고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해당 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에게 해당 되는 말씀이고 나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이고 나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로 가는 바울 일행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고생하는 과정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당시의 그런 사건을 기록한 것뿐이라면 대강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고생이 참 많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을 고비를 잘 넘겼다고 생각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깨달아야 할 것이 있는 말씀이고 교훈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잘 살펴보고 있습니다.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본문 27~29절에 “27.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 일행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서 싣고가던 짐들도 다 버리고 배에 필요한 기구들도 다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질 희망마저 사라진 절망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셨고 바울은 그들에게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져 가는 정황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이구나 하는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배를 타고 나온 지 열나흘째 되는 날 밤 자정쯤에 육지가 가까이 온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바닷물의 깊이가 점점 얕아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여 바닷물 깊이를 재어 보았습니다.

  처음 잴 때 스무 길이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미터법으로 계산하면 처음에는 약 37m이었고 좀 더 가서 다시 재어 보니 약 28m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좀 더 육지로 가까이 가다가는 암초에 걸릴 것이 염려되어서 배 앞편에 닻을 네 개나 내리고 밤이 지나고 날이 새서 밝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죽느냐 사느냐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는 데 그 결과를 기다리면서 지내는 밤이 얼마나 두렵고 애타는 기다림이었을까요?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는 기다리는 시간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대학시험 합격발표일이나 입사시험이나 인생의 중요한 문제가 결정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참 힘든 시간입니다.

  건강검진을 받고 나면 마음이 조금 불안합니다. 특별히 암이나 불치병의 흔적이 보여서 특별검진을 받고 나면 그 결과가 정말 조심스럽게 기다려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가서 재판을 받느냐 그냥 재판 없이 무사통과해서 천국으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때 만약 그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들을 하나하나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들이 나에게 주신 약속임을 믿고 담대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크고 작은 약속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면 큰일에도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고 사는 문제와 죽고 난 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들도 약속대로 될 줄 알고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오늘 이 배에 탄 사람들처럼 구원을 날을 기다리며 지내는 그 밤과 같은 인생입니다.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구원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나의 믿음이 과연 진실한 믿음일까? 내 믿음의 깊이가 몇 미터나 될까? 내 믿음이 점점 강해져 가고 있을까 아니면 더 연약해져 가고 있을까 점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강해져 가면 안심하고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구원은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평가도 심판도 없습니다. 이미 구원이 결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본문 30~32절에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배를 이탈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배를 운항하는 사공들이 자기들만 살려고 머리를 굴렸습니다.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았다고 했습니다. ‘이물’이란 배의 뒷부분의 갑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닻 네 개를 내린 ‘고물’은 배 앞부분의 갑판을 말합니다. 닻은 배가 움직이지 않게 하려고 큰 쇠로 만든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앞에서 닻을 내리고 있을 때 사공들이 배 뒤로 가서 닻을 내리는 척하고 거룻배를 내렸습니다. 거룻배는 비상시 탈출하기 위해서 배에 싣고 다니는 작은 배를 말합니다. 사공들이 작은 배를 내려서 자기들만 타고 육지로 도망하여서 자기들만 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분명히 이 배에 탄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공들은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들만이라도 살기 위해서 일을 꾸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저런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생명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좀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좀 더 잘 살기 위해서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노력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하는 노력은 헛된 것이며 오히려 더 악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잘살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놓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배에 탄 모든 사람을 구원해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아 서로 공격하지 않고 사이좋게 있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거기 있는 사람들 중에 절반만 생명을 구해주시겠다고 하셨다면 사람들은 그 반의 숫자에 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바닷물에 떠밀어 죽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너무나 귀한 약속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서로 미워할 필요도 없고 서로 도와주면서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모든 믿는 자들은 다 구원해주신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믿는 사람들도 서열을 매기고 점수 제도를 두어서 경쟁하게 만드셨다면 교회는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 교회에 오면 내 자리 빼앗을까 봐서 미워하게 될 것이고 이 좋은 복음도 비밀로 하고 쉬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십사만사천 명으로 제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면만 구원받는다면 우리는 교회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십사만 사천 명은 예전에 다 찼습니다. 초대교회 때 종교개혁 때 일제 강점기 때 순교한 사람들만 쳐도 이미 그 숫자는 다 찼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만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전도는 왜 해요? 전도했다가 나보다 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나오면 나는 낙오되어서 구원도 못 받을 텐데 겁도 없이 전도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는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더 감사한 것은 믿는 자에게 제한을 두지 않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다 구원을 얻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서로 경쟁을 하거나 서로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격려하며 함께 구원의 방주를 타고 천국까지 가면 됩니다.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거룻배를 내려서 자기들만 타고 도망가려고 하는 사공들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들이 살려고 도망하려는 모양인데 그것은 착각이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사는 것이다. 너희들이 이 은혜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군인들이 거룻배를 연결한 줄을 끊어버렸습니다. 거룻배를 타고 몇 사람이라도 생명을 건지는 것이 바른 일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군인들은 바울을 믿었고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방법이나 인간의 도구는 담대하게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다렸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외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이 고안한 방법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지게 된 믿음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본문 33~37절에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라고 했습니다.

 

  날이 새고 이제 배가 육지에 닿아서 구원을 받을 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이제 음식을 좀 먹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배가 풍랑을 만나서 밥을 먹지 못하고 지나온 날이 14일이나 되었기 때문에 이제 음식을 좀 먹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은 너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풍랑에서 구원을 받을 때가 되었는데 밥을 먹지 않아서 죽게 된다면 억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좀 익숙한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떡을 가져다가 축사를 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서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찬예식을 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떡을 떼어서 축사하고 나누어 주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라고도 하셨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불신자기 때문에 거기서 성찬예식을 행하였다고 보기 힘듭니다. 다만 떡을 떼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바울이 먼저 먹음으로 거기 모인 사람들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모습을 보면서 성찬예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그 예식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이 결국은 영원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이 결국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그 모든 일에 대처해나갈 때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죄에서 멸망에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늘 기억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로 가면서 당하는 고통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보호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바울 때문에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해주시는 모습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이 위대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임무이다.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 구원에 이르는 삶을 위해서 즉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