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72)

  본문 : 행 27:9-20

  제목 :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요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세상 사는 것을 많이 어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저런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직장 때문에, 사업 때문에 걱정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아서,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잘살고 있는 사람은 잘살고 있는 것이 불안해서,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것이 억울해서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마냥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는 일은 자랑스럽고 보람되지만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걱정거리가 많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들 때문에 가장 평안해야 할 교회까지도 서로 싸우고 가장 사랑해야 할 성도들끼리도 서로 미워하고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요즘 제 혼자 가끔 흥얼거리는 옛 노래가 있습니다. 무슨 노래인지도 처음도 끝도 모르지만 제가 흥얼거리는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언제부터 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 빗속에 서 있었을까”

  언제부터 우리가 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언제부터 이런 어려운 일이 시작되었을까요

 

  이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비가 오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 우리에게 주신 이 지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천지창조 기사가 기록된 창세기 2장에 천지창조를 마친 후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4-6)

 

  하나님께서 처음 이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 비는 오지 않았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서 온 지면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그때는 비가 올 필요도 없었고 비가 올 수 있는 환경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물이 지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과 동식물이 잘 살 수 있는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바람이나 구름이나 비가 올 수 없었고 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음 비가 온 때가 노아 홍수 때입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7:4)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칠 일 후부터 40일 동안 내린 비가 최초의 비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죄악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는 비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고 살 때 그런 인간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내리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빗속에서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와 함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고 비와 함께 우리 인생의 고통도 더 심화 되고 사람들은 다 죄로 인해서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고 있는 이런 귀한 길에도 역시 비가 내리고 어려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미항을 떠나서 뵈닉스라는 그레데 항구까지 가려는 여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고통을 당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본문 9-1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가이사랴를 떠나 미항까지 오는 여정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로마로 가야 하는데 다음 배의 여정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바울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겨울을 지내고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선주나 선장은 여기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까 조금 더 가서 겨울을 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최고 책임자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인솔하는 책임자였고 배나 모든 사항은 로마의 결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백부장이 죄수로 호송 당하고 있는 바울의 말보다 이 배를 잘 아는 선주나 뱃길을 잘 아는 선장의 말을 듣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당연히 바울의 말보다 선주나 선장의 말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떠나서는 안 되고 여기서 겨울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금식에 중점을 둔 말이 아니라 그 절기에 중점을 둔 말입니다. 여기 금식하는 절기란 9-10월경에 있었던 속죄일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여행 당시였던 주후 59년 속죄일은 10월 5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태풍이 몰려오고 파도가 드세게 몰려오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런 환경을 잘 아는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미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때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전도 여행 때 배로 여행하는 도중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하여 어려움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고후11:25)

 

  이어서 바울이 말하기를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지금 떠난다고 하면 배에 실은 물건들은 물론이요 선박과 사람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배를 타고 떠나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 것은 꼭 경험에 의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계시면서 이런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미리 알도록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견해와 다르게 선주나 선장은 지금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했습니다. 지금 머물러 있는 미항이라는 곳은 말만 미항이지 사람들이 지내기가 편한 항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고자 하는 뵈닉스라는 항구는 한쪽은 서북으로 한쪽은 서남으로 향하고 있어서 서쪽을 향하여 열려 있는 항구처럼 생겨서 겨울을 나기가 좋은 항구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지역적인 것도 있겠지만 지금 있는 미항은 작은 항구로 먹거리나 볼거리 같은 것이 부족하고 뵈닉스라는 항구는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고 필요한 것을 잘 구할 수 있는 편리한 항구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우리도 백부장의 선택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편하고 우선 재미있게 사는 쪽으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좀 힘들어 보여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신앙생활을 우선으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보다 이 세상의 쾌락을 중심으로 선택을 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본문 13-17절에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의 경험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출항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인간의 욕심을 따르는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출항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아 우리가 잘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순풍에 돛을 올리고 출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빗나갔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순풍이 부는 길이었지만 출발하자마자 곧바로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유라굴라라고 하는 광풍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유라굴로는 북동풍을 말하고 광풍은 태풍을 말합니다. 그 지역의 특성으로 그 계절이 되면 자주 일어나는 풍랑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알아보고 생각했더라면 발견할 수 있는 풍랑이었습니다. 욕심만 채우려다가 바로 앞에 부는 순풍만 보고 나갔다가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풍랑으로 인한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이 15-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고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

  우리가 배를 잘 몰라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잠시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를 뭔가 그쪽으로 일이 잘돼 갈 때 그 길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쉬운 길 잘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이 하나님의 뜻일 때도 있습니다. 사탄이 쉬운 길을 보여주면서 유혹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 이야기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차라고 했는데 니느웨로 가기를 두려워하여 도망갑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서 얼른 올라탔습니다. 그 배가 풍랑을 만나고 파선이 되어서 큰 고기 뱃속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이란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믿음의 길이 아닌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는 길이 쉬운 길입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본문 18-20절에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고 했습니다.

 

  한번 길을 잘못 선택한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배와 배에 있는 짐들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안 되니까 제일 먼저 싣고 가던 짐을 내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배의 기구들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기구는 소소한 가구일 수도 있고, 항해하는 데 꼭 필요한 닻이나 돛일 수도 있습니다. 배의 무게를 줄여서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려고 될 수 있는 대로 무거운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날 동안 해도 달도 보이지 않도록 먹구름 속에서 풍랑은 계속해서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살아날 가망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희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목숨이 걸린 문제에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살아날 가망이라도 있으면 희망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이라도 해 볼 것이지만 전혀 가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스러운 형편을 만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적 같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의 항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길로 항해를 한다고 해도 위험한 일을 만나고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우리가 사는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벌을 받고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길은 소망이 있는 길이고 어떤 길은 구원의 여망도 없는 절망의 길입니다.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은 구원의 소망이 있는 길입니다. 쉽다고 해서 재미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따라 산다면 우선은 쉬운 길 같지만 절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 절망 길을 가는 인생길에서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길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길을 선택하여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장래를 내다보면서 어렵지만 미항에서 겨울을 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주와 선장의 말을 듣고 또 좀 편하게 지내보려고 눈앞에 보이는 순풍을 따라 출항을 했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여망마저 없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자기 생각대로 살면 구원의 여망마저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가는 이 믿음의 길은 구원의 소망이 있는 길입니다. 반드시 죄에서 죽음에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확실한 길입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이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