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67)

  본문 : 행 26:1-8

  제목 :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오늘부터 몇 시간 우리가 살펴볼 26장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과 그리고 유력 인사들 앞에서 자신이 고발을 당한 내용에 대해서 변호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호를 시작하면서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본격적으로 변론을 하기 직전에 서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변명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폴로게오마이’(ἀπολογέομααι)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변명이라는 단어보다는 ‘변호’나 ‘변증’이나 ‘변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변명이라고 번역을 한 것은 원래 변명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고 변명이라고 번역을 했을 것입니다. 변명의 뜻은 “옳고 그름을 가려서 사리를 밝힘”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뜻을 알고 변병으로 읽으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명이라고 하면 그것보다도 또 다른 뜻인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이라는 뜻을 보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을 잘못하고 그 실수에 대해서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디펜스(defense)로 번역을 했습니다. ‘방어, 혹은 수비’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혼자 외롭게 수많은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서 방어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특별히 복음을 알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일에 대해서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더러는 비웃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를 방어를 하고 변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복음을 알고 믿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그 믿음이 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세력이 시시때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냐?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살아야 복을 받지 어떻게 믿는다고 복을 받느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지 있을지도 모르는 천국이니 부활이니 영생이니 그런 것을 어떻게 믿느냐?…….

  우리 자신도 참 연약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다가도 몸이 좀 아프거나, 살기가 힘들거나 어려움을 당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반대로 너무 잘되거나, 돈이 많아지고 세상사는 재미가 늘어나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매 주일 교회에 와서 이런저런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고 배우는 것은 이런 사탄의 공격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 세상 것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하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도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를 더 확실하게 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수많은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에서 오는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본문 1-2절 말씀에 “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사건을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급법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그랍바왕이나 베스도 총독 앞에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0여 년 동안 세계로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또 틈만 있으면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만 해도 길고 짧은 바울의 설교 아홉 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는 아홉 편이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설교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 이 자리는 유대지역을 통치하는 최고의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인 아그립바와 그의 여동생이 있었고 시중의 높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파송한 최고의 지도자인 베스도 총독과 그의 부하들인 천부장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가 고위공직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28장에 가면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고 높은 사람들이 재판관처럼 배석하고 있는 이런 자리에서의 설교는 오늘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늘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히게 되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왔었습니다.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내일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오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마음을 조금은 이해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어디 가서 목사님들이나 성도님들에게 이 복음의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저 같은 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복음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면 바울 이전에도 이후에도 바울과 같이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예수님께 직접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는 그 모습을 본 사람입니다. 자신도 그 천국에 가서 그 황홀한 천국의 모습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꾸며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없이 긴가민가하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남을 속여서 뭔가를 얻기 위한 장사꾼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직접 보고들은 복음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귀찮게 하거나 겁을 주거나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죄에 관한 문제 죽음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간단하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듣고 믿기만 하면 엄청난 것을 얻는 너무나 귀한 말씀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전하고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질 때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합니다. 성도들도 서로 만날 때마다 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 자랑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자랑하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강단에 서면 무엇보다도 이 복음을 먼저 이야기 하고 이 복음을 최고의 것으로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본문 3-6절에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고발에 대해서 변호를 하면서 우선 이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 자신이 과거 유대인으로 율법을 바르게 배우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낸 바리새파 사람임을 확인했습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확인했습니다. 바울의 출생지는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라는 곳입니다. 지금의 터키 남부지방입니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은 예루살렘이었고 그것은 유대인들이 다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유대교의 가장 엄하다고 인정하는 바리새인으로 생활하였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가장 정통적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울이 주장하는 복음이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통적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나 제물을 바치는 일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나 율법을 따라 사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바치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외형적으로 그런 일들을 했지만 속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함은 위선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많이 꾸짖으신 사람들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자주 질타를 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주로 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의 복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성경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면서 막상 자신들이 그 율법 앞에서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것처럼 행세를 했지만 속에는 탐욕이나 방탕 같은 흉악한 죄가 가득했습니다.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인척 가장을 했지만 사실은 흉악한 죄인인데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착한 척 거룩한 척 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외형적으로 좀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복음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앞세우고 자신의 의로움을 앞세웁니다. 그런 교만함 때문에 이렇게 좋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본문 6-8절에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난 후에 그런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언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것을 시비하여 고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을 주는 것인데 그 소망을 가졌다고 고소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증명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느냐 안 하셨느냐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다윗 왕을 통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주시고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해주시겠다는 언약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살았습니다. 나라를 로마에게 빼앗기고 짐승처럼 생각했던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비참하게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시면 이런 비참함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은 사람 한 사람 살리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속으로는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인해서 벌어질 사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인정해야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위 공직자들 앞에서 복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비록 죄인으로 몰려서 자신을 변호하는 자리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랑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이 복음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복음을 더 많이 알고 더 확실하게 알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