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립보서 216-18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의 몸으로 조직된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공동체답게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은 하나의 질서를 따라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1:22, 1:18). 또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릿돌이 되십니다(4:11, 벧전2:7). 따라서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조직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교회는 교회 될 수가 없고, 세상의 조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일꾼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직분으로서의 일꾼이 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역적인 부분으로서의 일꾼이 있습니다. 교사, 찬양대와 같은 조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에 있는 조직이요, 일꾼이라면 목사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된 교회를 보살피고, 양육하기 위해서 목사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를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성도들을 말씀 안에서 양육하게 하십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일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목사의 중요성은 다른 직분과 비교할 때 매우 크다고 할 것입니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세우심을 입고 교회 안에서 사역하는 직분자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옆으로는 성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역합니다. 그리고 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갑니다. 물론 목사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서 사역하게 되고, 성령이 원하시는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무엇인가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무런 보람도 없고 기쁨도 없다면 그 사역은 힘이 없게 되고, 열매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의 보람과 기쁨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들을 통해서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뻐하라(χαίρω)”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특징은 함께 기뻐하라(συγχαίρω)”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바울 자신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 인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이 기쁨을 보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 인해 얻는 기쁨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 인해 얻은 기쁨은 바로 오늘 교회의 지도자들이 얻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목사로 세움을 입은 자가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기쁨과 보람을 얻지 못한다면, 이는 목사 개인적으로나 교회 전체로나 유익이 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에서 얻는 기쁨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의 이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 안에도 충만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광성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교회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광성교회의 목사된 자로서 저 또한 큰 기쁨을 얻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기쁨과 빌립보 교회의 기쁨이 바로 저와 우리 교회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역이 헛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본문 16절에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두 가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달음질(τρέχω)”입니다.

이는 달리다. 서둘러 가다, 힘써 나아가다, 열심히 구하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정력을 바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바울의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오늘날의 올림픽과 같은 대규모의 운동경기가 자주 열렸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기가 바로 달리기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달리기에 비유할 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마치 달리기 선수가 결승선을 향하여 전력으로 질주하듯이 감당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전심전력했습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일에 전념했습니다. 때로는 이 일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방해자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기로 여러 번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물들이 바울의 사역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장애물들은 바울의 사역에 대한 마음을 더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마치 파도가 배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배의 속도를 높여주는 결과는 낳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울의 복음 사역에서 만난 장애물들은 바울의 사역의 속도를 높여주는 등 바람과 같았습니다.

 

 

둘째는 수고(κοπιάω)”입니다.

이는 피곤하다, 지치다, 녹초가 될 정도로 열심히 일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자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장면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한 고백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이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에 바울이 육체적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의 육신은 너무나도 지쳐 있습니다. 그의 육신은 피곤에 절여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정력이 하나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사역의 결과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달음질과 수고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몸을 빌립보를 떠나있지만,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빌립보 교회와 함께했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저들을 복음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빌립보 교회가 원망이나 시비로 인해 흔들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빌립보 교회가 빛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생명의 말씀을 밝히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실 본문 앞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를 향하여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대로 빌립보 교회가 바르게 선다면 그것은 분명 바울이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자랑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열매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자랑거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울의 달음질과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바르고 아름다운 모습을 인해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지도자가 가지는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즉 세상의 영광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다 헌신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저들에게 복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때로는 저들의 부족함이 자신의 책임인 양 아파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수고하고 달려온 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선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그 지도자는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달음질이 헛되지 않음을 볼 때 큰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명의 완성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본문 17절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교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순교의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는 그 날까지 계속 전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순교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온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조차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전제로 드려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물(θυσία)”은 문자적으로 제사,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할 때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너희 믿음의 제물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모든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가 매일의 삶을 사는 것은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입니다.

 

 

또한 섬김(λειτουργία)”은 본래 자신의 희생이 수반된 공적인 봉사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도 하나님께 적용되면 예배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이 섬김은 앞에 나오는 믿음의 제물이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즉 바울이 강조를 위해서 반복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제물과 섬김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기초한 예배의 삶, 다시 말하면 헌신과 충성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이러한 삶을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적인 삶이었고, 헌신의 삶이었고, 충성의 삶이었습니다. 이를 바울이 인정하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전제(奠祭;σπένδω)”는 고대 제사에서 맨 마지막 단계에서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그 제사가 완전하게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도 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드린다고 하는 표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순교를 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표현은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모두 바울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6절에서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사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주님과 함께 거해야 하는 때가 임박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을 서운한 마음이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순교가 마치 전제와 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순교는 자신의 사명의 길이 결코 헛된 길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사명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순교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순교를 통해서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과 삶이 온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한삼서 13-4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지도자가 누리는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보내주는 연보가 바울의 기쁨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러한 것도 기쁨이 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도들을 통한 영적인 기쁨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성도들이 믿음에 바로 서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성도들이 바르게 성장하여 저들의 삶 속에서 영적인 열매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를 인하여 주님께로 돌아온 모든 영혼을 인하여 주님께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을 소망하며 기뻐합니다.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와 함께 기뻐하라.

본문 17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뜨거운 사랑이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앞에서 순교의 의미를 담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 사실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슬픔과 좌절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빌립보의 성도들이 기쁨과 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빌립보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저들이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말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쁨을 함께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이 기쁨, 복음을 통해서 가지는 이 기쁨, 또한 자신의 수고를 통해 맺어진 열매를 인하여 가지는 기쁨, 장차 그리스도 앞에서 받을 영광과 칭찬과 상급을 소망하며 가지는 기쁨을 자신만이 가지고 누릴 것이 아니라 빌립보의 성도들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순교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슬픔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슬픔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는 현장이요 증거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순교는 교회의 승리를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큰 용기와 소망을 안겨 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승리하며 하늘로 귀환하는 용사의 모습을 통해서 큰 도전을 받게 될 것이고, 자신들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이 그렇게 될 것임을 소망하면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기쁨에 동참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기회로 생각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비록 그것이 순교라는 자리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통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기쁨은 그러한 성도를 양육하고 인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가 누리는 기쁨은 혼자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기쁨은 교회 전체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의 기쁨은 하나여야 합니다. 지도자는 수고와 헌신의 열매를 인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헌신을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 지는 것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모든 성도가 함께하는 기쁨이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오늘 내 안에는 참 기쁨이 있습니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 세상은 결코 맛볼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기쁨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과연 무엇으로 인해 그 기쁨이 내 안에 있습니까? 세상의 물질과 명예에서 그 기쁨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분명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 삶을 통해서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배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은 나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함께하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와 함께하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하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성도들의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삶,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삶을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자랑거리로 삼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날, 큰 기쁨으로 주님의 얼굴을 보며, 그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