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나타나는 삶

 

 

 

 

 

빌립보서 214-16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聖徒)”입니다. 이 이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불릴 수 있는 이름도 아닙니다. 이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나도 크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성도(聖徒)”라는 단어의 뜻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라는 것은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입니다. 성도는 죄로부터 구별된 자입니다. 성도는 죽음으로부터 구별된 자입니다.

 

 

결국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세상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아직은 이 땅에서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성도의 세상에서의 삶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는 곳에 정을 붙이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자신이 사는 곳에 관심이 있겠지만, 거기에 자신의 전부를 맡기지는 않습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들과는 무언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의 삶도 중요한 것이지만 성도는 세상 속에서의 삶도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마땅히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근거는 복음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전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고, 또한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인 사탄은 우리가 그 완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할 수만 있으면 우리까지라도 넘어뜨리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깨어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넘어지고, 엉뚱한 길에서 헤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는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독버섯처럼 생겨나고 자라나 교회를 흔들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서도 있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그리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하나를 이루기를 소망하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이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그 과정에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일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권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잠시만 방심하면 넘어집니다. 곁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살피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빛으로 나타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가 교회 안에서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지금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시비했던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16:7, 11:1). 여기에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이 일들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는 목표를 위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과정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원망은 불평을 품고 수군거리는 것을 말하며, 시비는 악의(惡意)를 가지고 벌이는 논쟁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자주 보여준 모습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불평하며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불순종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로 인해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키는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일어나는 불화에 대해서 성도들끼리 불평이나 시비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생각이 다르다고, 성도들의 의견이 충돌한다고 해서 서로가 원망하고 서로 시비를 일으킨다면 교회는 흔들릴 수밖에 없고, 사탄만 기쁘게 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각각 다르고 사람의 생각이 각각 다른 것처럼 아무리 옳은 일이요 아무리 교회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하고 또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르다라는 것과 틀리다라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모두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다를지라도 그것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나와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의 성도들은 나와 다른 사항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시비할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견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나타난 것처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원망과 시비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아주 괴악한 독소입니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겸손의 자리에 서는 것은 교회를 아름답고 튼튼하게 세워가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자주 만나는 일들이 바로 나와 다른 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원망하게 되고, 시비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라면 우리는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원망하거나 시비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성령 하나님께서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원망이나 시비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감사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이는(να)”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하는 권면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왜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은 바로 우리가 이 패역한 세대 가운데서 빛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를 정의하기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이 제시하는 똑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를 가리킵니다. 또한 이미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왜곡되어 버린 세대를 가리킵니다. 결국 이 세대는 불법적이며 사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시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신명기 325절에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그 때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대를 가리켜서 예수님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12:39, 17:17).

 

 

결국 이러한 세대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세대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세대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반드시 버려야 하는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세대로부터 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세대에서 함께 멸망하지 않도록 구원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도는 이토록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에서 성도의 분명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성도가 이 세대에서 성도로서의 모습을 당연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을 향하여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세가 바로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5:14). 이 빛은 분명 성도 자신의 빛은 아닙니다. 이 빛의 근원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절에 예수님만이 참 빛(τφς τὸ ἀληθινν)”이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다만 그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존재입니다. 즉 성도는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빛의 역할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성도가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빛은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빛된 삶은 세상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어두움들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이 하늘의 어두움을 몰아내듯이, 성도의 빛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어두움의 잔재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준입니다. 빛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것들이 빛을 향하여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정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왜곡된 시선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바른 시선과 사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밝히는 존재입니다. 또한 성도는 세상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있는 곳에서는 어두움이 물러가야 합니다. 성도가 있는 곳에는 왜곡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입니다. 세상이 성도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그릇된 모습을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삶으로 나아오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가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흠이 없다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이 없음을 가리키며, 순전하다라는 것은 이질적인 것이나 온전치 못한 것이 즉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전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요, 후자는 안에서 품고 있는 성품입니다. 결국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흠을 잡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죄악을 지적하고,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오히려 세상에게 지적을 받고 세상보다 더 깨끗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빛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당시의 세상의 모습과는 다른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즉 당시의 세대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인데 성도들도 그러한 모습을 세상에 보인다면 교회와 세상이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움 것처럼 교회도 어둡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모습보다 더 깨끗해야 하고, 세상보다 더 순수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교회를 본받고, 교회를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늘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성도의 삶의 모습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성도의 모습을 본받도록 해야 합니다.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이지 어두움이 빛을 삼킬 수는 없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의 기준이 되고, 세상의 모범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의 삶은 성도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빛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은 분명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빛을 비추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그 순간부터 빛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곡된 빛을 비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가려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참 빛이신 예수님의 그 빛을 그대로 비추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이 패역한 세대,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망과 시비가 없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또 하나의 목적입니다. 15절에서는 빛된 행실을 강조했다면 본문에서는 복음의 전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즉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들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믿고 구원을 얻은 복음입니다. 이제는 빌립보의 성도들이 밝혀야 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밝혀(πέχοντες)”라는 표현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단단히 붙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나타난 세상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린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들입니다. 곧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의 성도들은 이 복음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안팎으로 밀려오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저들이 그 복음을 붙들고 지킨다고 하는 것은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먼저 저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굳게 붙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그 복음에 대해 관심도 없습니다. 따라서 저들에게 복음을 드러내 주지 않으면 저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마치 빌립보에 사도 바울이 들어오기 전에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저들은 철저하게 세상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멸망의 길을 알지도 못하면서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마치 빛을 비추듯이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 안에 가두어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땅 끝까지 증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뛰쳐나와 거리에서 그 복음을 외쳤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사마리아로 가서 전했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다니면서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세움을 받은 사도였고, 그는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까지 가서 황제 앞에서까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제 이 일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어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의미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이 되지 않으면 두 번째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굳게 지키고 있을 때, 그것을 세상을 향하여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것도 지키지 못하면서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이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함이 자신에게 미치는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마지막 날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고, 양육을 받은 빌립보 교회가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은 바울이 주님께로부터 받을 칭찬과 상급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전심전력으로 달려왔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정력을 다 쏟았습니다. 바울은 온 힘을 다하여 충성했습니다. 피곤하여 지쳐 쓰러질 정도로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쓰고 애써서 세우고 양육한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그 모든 수고와 열심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 인한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정당한 길을 걸어왔음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드러내놓고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빌립보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고 교회다운 모습으로 성숙하기를 소망하며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작은 불씨에 대해서도 노심초사하며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내는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우리의 선배들을 통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복음,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할 책임을 져야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말씀이 오염되지 않도록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 말씀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빛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생명의 말씀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말씀으로 나아오게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수해준 신앙의 선배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를 생명의 말씀으로 지도한 지도자들에게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한 세상, 생명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세상, 생명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도 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세상과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빛의 삶을 살아가면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생명의 복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 안에서도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원망이나 시비를 철저하게 버리고, 오직 빛으로 나타나는 삶,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