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빌립보서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습니까? 오늘 당장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난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마쳤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우리는 이를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한때는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에서 이에 관해서 강조했었고, 전도하는 현장에서 또는 성경공부라고 하는 과정의 맨 처음에 반드시 등장했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는 이론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따라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자신있는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닌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 안에 이러한 확신과 대답이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나의 주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겸손하셨던 것처럼 겸손해지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셨던 것처럼 교회와 성도들 높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계속됩니다. 본문 12절에 그러므로라고 했습니다. 이는 앞에서 나타난 내용들을 근거로 해서 다음의 권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라(τν αυτν σωτηρίαν κατεργάζεσθε)”라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를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의미대로 말한다면 영적인 성숙을 위해 힘쓰라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이를 명령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이 권면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나태하지 말고 영적인 성숙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가장 힘써야 할 것이 바로 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이 완성을 향해서 날마다 전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까지, 그리고 그 주님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하는 날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는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며, 주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표현을 쉽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구원이 우리의 믿음과 관련해서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할 때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과거적인 구원입니다(중생,칭의).

요한복음 52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옮겼느니라(μεταβέβηκεν)”라는 표현은 과거완료형입니다. 이미 과거에 완성되었고,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선택을 받은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 안에 일어나는 중생(重生)의 역사는 우리의 구원이 확고부동한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현재적 구원입니다(성화, 견인).

히브리서 1039절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함에 이르는(ες περιποίησιν)”라는 표현은 영어로 “saving”으로 현재 구원이 진행되고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완전함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연약하고, 아직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고, 우리는 아직도 세상을 완전히 등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죄와 싸워야 하며 세상과 멀어지는 훈련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이 성화의 기간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방법에 있어서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어떤 삶의 과정을 통해서도 이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연속적인 과정입니다.

 

 

셋째는 미래적 구원입니다(영화).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을 이루라(τν αυτν σωτηρίαν κατεργάζεσθε)”라는 것은 너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라라는 뜻입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418절에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하시리니(σώσει)”라는 표현은 분명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상황에서 이 날을 맞이할지는 모르지만,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완전하게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화(榮化)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순간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주님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시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와 아직(already, not yet)”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때까지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완성된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실수도 합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 안에 항상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뜻이 우리를 통해서 완성되게 하십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가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이 세상에서 증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그 결과에 대해서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완성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복종과 경외함으로 이루는 구원입니다.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칭찬하는 빌립보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복종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과 함께 있을 때에도 복종을 잘했던 교회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했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과거에 빌립보 교회가 아름답게 복종했던 그 모습을 계속해서 유지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잘했다 할지라도 현재와 미래에까지 지속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어서 복종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복종에 있어서 만족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면서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종한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을 완전히 버리시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던 예수님의 복종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종해도 예수님의 복종처럼 만족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의 복종은 중단될 수 없이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자신 스스로 만족하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교만의 모습일 뿐입니다.

 

 

또한 본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는 경외(敬畏)’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여기의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과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지언정 무서워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조되는 속성 가운데 큰 두 가지가 바로 사랑공의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에게는 한없는 사랑으로 다가오시지만, 죄인들을 향하여 진노하신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와 믿음으로 대해야 하지만, 또한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는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 앞(Coram Deo)에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면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알기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경외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확실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은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성령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는 그 구원을 완성해 갑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지혜로 불가능한 이 일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역사를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철저하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닮음이 완성될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취되는 구원입니다.

본문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2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을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전혀 없지만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결과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분명하게 요구됩니다. 첫 번째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면 성화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세상과 죄악과 멀어지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출발은 항상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행하시는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나 선택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움직이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를 그 뜻 가운데서 움직이게 하시지만 결코 강제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하지는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그 뜻을 행할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셨습니다. 이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소원은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영원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도, 그 택한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무덤에까지 낮아지신 것도,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도록 하신 것도,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1:6). 이제 하나님은 그 시작하신 일을 붙드시고 당신의 그 뜻을 따라서 진행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몸부림친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힘쓰고 애를 쓰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7).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기쁨을 위하여 오늘도 영원 전에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먼저 구원받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 한가지 사실만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끝난 것은 분명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그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진정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이제는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장차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영원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