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외에는

 

 

 

마태복음 171-8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의 5대 사건-성육신, 변화, 십자가, 부활, 승천-이라고 불리는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가는 시점, 곧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걸음의 초기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준비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사건은 제자들의 마음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엿새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습니다(16:16). 하지만 예수님은 이 고백을 들으신 후에 곧 바로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로막는 베드로와 제자들를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4-25).

 

 

그로부터 엿새가 지난 후,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이 높은 산이 과연 어떤 산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으나 다볼산이나 헬몬산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산인가 아는 것보다 그 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우리는 사건으로 시선을 옮기려고 합니다. 예수님과 세명의 제자가 산 위에 올랐을 때,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했습니다. 본문은 그 모습을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2).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집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본문의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의 관점은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 가운데서 무엇을 생각하고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보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오직 예수 외에는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를 저 변화산으로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세가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인생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 오르시고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셨을 때, 어디선가 두 명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9:31). 여기의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들은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인정을 받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먼저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과정에 민족 전체가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궁중에서 40,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시내산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선포하고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이 때는 야곱의 식구 70명이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지 43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하에 홍해를 건넜고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신정왕국을 건설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법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서 40일을 금식하며 하나님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하면서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율법을 준수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장구한 날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와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 저들의 삶에 근간이 되었습니다. 비록 역사가 흐르면서 이 율법의 의미가 변질이 되고 퇴색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는 사실만큼은 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남았습니다. 비록 이것도 훗날 변질된 선민사상으로 남고 말았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율법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관계로 남았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즉 율법을 생각하면 모세를 제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모세를 거론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예수님께 나타난 것입니다.

 

 

다음으로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세벨의 미혹에 빠져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으로 뒤덮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출생의 기록도 없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기록도 없지만, 그의 역할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결코 뒤처지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후에 36개월이 지난 후에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대결을 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의 응답을 받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 대결의 승리로 인해 그에게는 불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세벨의 칼을 피해서 광야로 도망하고 호렙산까지 가서 다시금 하나님의 사명을 받게 됩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선택한 후,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의 선지자들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예비자로 엘리야가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4:5). 그만큼 이 엘리야는 장차 오시는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엘리야 선지자가 예수님께 나타나서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만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분명 이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아니 가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삶의 모습이나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당한 사명은 오늘 우리의 삶과 사명의 길에 아주 중요한 표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자 몸부림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 하나는 이들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이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비록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즉 이들이 예수님처럼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저들을 영원토록 바라보고 따라가야 하는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빛난 구름 속에서 제자들에게 들린 음성도 모세와 엘리야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5).

 

 

.현실에 안주하려는 인생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산에 올라온 제자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나도 황홀한 광경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분명 저들의 지각 능력은 살아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타난 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사실조차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저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면서도 이 사실 앞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본문 4절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9:33). 이는 그만큼 이 제자들이 당황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자기들의 현실을 둘러싸고 있는 이 엄청난 광경에 압도당하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이 말은 자신이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즉흥적으로 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 말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상황은 예수님과 자신들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의 죄를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1:21). 그래서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의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1:29).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하게 이 일을 위한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발걸음은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하는 시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영광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앞으로 남아 있는 이 모든 생애를 무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는 영광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영광의 모습에 안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건너뛰고 영광만을 취하고자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인식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산 아래에는 아직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제자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황홀한 장면에 자신들이 온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지금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사명도 아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지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가운데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장차 저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산 아래에서는 예수님이 필요한 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영혼은 아직도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저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바로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한 후에는 분명 주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도 잊어버렸습니다. 산 아래에 대한 관심도 끊어버렸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답고 황홀한 상태에서 머물러 안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천막을 짓고 여기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 그리고 이들을 수종드는 세 제자의 모습, 생각만 해도 벅찬 가슴이 아닙니까? 하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훗날이 어찌되든지 우선 당장 현실 속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훗날의 모습이 현재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답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실의 모습만 보면서 그 현실 가운데서 안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도 우리의 목적은 바뀔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복음이요, 그의 몸된 교회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목적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저 산 아래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반기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고 배척하며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는 이들까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산 위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황홀한 광경이 있습니다. 어느 누가 이 산 위의 모습을 버리고 저 산 아래로 돌아가고자 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이 행복한 상황을 버리고 저 살벌한 세상으로 가고자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이 산 위가 좋아도 이곳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하는 곳은 이 산 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 하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은 이 산 위가 아니라 저 산 아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고, 거기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8절에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산 위에 있을 것을 간청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빛난 구름이 저들을 덮었습니다. 여기의 구름은 성경에 종종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특히 빛난 구름이라고 했는데 이는 햇빛에 반사된 구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의해서 나타나는 빛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름조차도 일반적인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위해서 동원하신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이 구름으로 인해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나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부패한 눈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현장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가뜩이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구름까지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가운데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본문 5절에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소리 또한 자연적인 소리는 아닙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음성을 제자들이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 직접적인 음성이 세 번 나타나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3:17), 그리고 본문과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직전(12:28)에 들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이 계시는 현장에서 들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그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심정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말론적인 종이요, 선지자이심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모세의 말보다, 엘리야의 말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요,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치고 또 외쳤던 예언의 최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나 선지자들은 저들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 비한다면 한낱 보조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광경만으로 두려운데, 하늘의 음성까지 들은 제자들은 거의 죽은 듯할 정도로 심히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우리는 거룩한 공포라고 부르는데,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 후에 그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나타내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6:5).

 

 

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저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7).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행동이요, 말씀입니다. 끝까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오는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모습입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들 속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에 제자들을 향하여 그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과연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했습니다. 그 화려했던 예수님의 모습도 없습니다. 그 위대한 율법의 중보자인 모세도 없습니다. 그 위대한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없습니다. 그 화려하고 빛난 구름도 없습니다. 저들의 눈에 보인 것은 단지 산 위에 올라올 때의 그 모습 그대로의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는 율법도, 선지서도 그 의미를 다하고 사라질 뿐입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그림자인 율법과 선지서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에 집중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이 중요하고 선지서들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하며 암시적으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저 율법이나 선지서들은 모든 사람들을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예수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성해야 할 면이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저들의 말이 당연하고, 옳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우월하고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아무리 인기가 많고, 많은 사람들이 추종한다고 할지라도 저들이 수많은 죄인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우리의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다만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들이요,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자들일 뿐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이요, 실체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의 죄인이요,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이 필요한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눈을 밝히 떠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눈과 귀를 잠시 즐겁게 하는 현실입니까?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진정 우리가 바라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요, 오직 복음이요, 오직 십자가요, 오직 그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장차 들어가야 하는 영원한 나라, 곧 천국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잠시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이 세상의 것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바라보고 달리는 사람은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웅덩이 때문에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잠시 비틀거릴 수는 있지만, 그 목표를 놓치지는 않습니다. 바로 우리의 시선이, 우리의 목표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면, 이 세상의 작은 것들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의 발걸음이 멈추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 오직 예수만 바라봄으로 최종 승리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