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최고이신 그리스도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서신을 쓴 목적은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문제의 소지가 있었지만, 그것을 책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좋은 모습들을 더 발전시키고 성숙해 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본받고 추구해야 할 목표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겸손을 빌립보 교회가 본받음으로 인해 교회 안에 내재하고 있는 논쟁이나 분열의 씨앗을 제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면서 바울은 예수님의 실체를 아주 실질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교사요, 실제로 모범을 보여주는 삶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분은 성자로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영광과 권능에서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실 수 있고, 누리셔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자신의 권리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높아짐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히려(λλ)”라고 하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의 내용과 강하게 반대되는 개념을 설명하고자 할 때 사용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그러나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소극적인 개념에서 멈추지 않으셨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취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라고는 주제에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대속사역을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의 교회에서 사용했던 찬송시의 일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익숙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에서 드러내고 실천하는 일을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알지 못해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은 알면서도 잘 안되고,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 십일조를 드리려야 한다는 것, 봉사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통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한다는 것, 세상에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편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이 가운데서 온전하게 실천하며 삶으로 나타내는 일을 얼마나 됩니까?

 

결국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실증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 어떤 현상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최고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재적으로 보이신 겸손의 극치가 어디까지였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을 성도들이 가진다면 교회 안의 그 어떤 문제도 아름답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겸손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을까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겸손의 최고이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논쟁과 이단 시비 문제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된 문제인 케노시스설(κενοσις)”을 말하는 가장 정확하고도 분명한 구절입니다. 이 케노시스(kenosis)란 말은 성육신으로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헬라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모습은 그대로 가지고 계시지만 성육신하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육신을 입으심으로 자신의 전지하심이나, 전능하신, 그리고 편재하심과 같은 요소들을 스스로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다(40:28).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능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피곤하셨고, 목마르셨습니다(4:6, 19:28).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서 모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36).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어찌 하나님이신데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그렇게 하기로 하셨습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어쩔 수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셨고,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겸손이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세 개의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비웠다, 둘째는 종의 형제를 가졌다. 셋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입니다. 그런데 둘째와 셋째 문장은 첫 번째의 문장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즉 첫 번째 문장을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는데, 그 결과가 종의 형체를 가졌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비워(κενόω)”라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만이 지니시는 신성이나 본질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신성이나,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이 신성과 본질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도 하나님이 아니신 것처럼, 전지전능하심에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셨습니다.

둘째는 종의 형제를 가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심은 이제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 종의 형체를 가졌다(λαμβάνω)”라는 것은 종의 외적인 모습을 취하셨다거나 종의 형체로 가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은 종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시고 완전한 종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신성;神性)는 유지하시면서도 종의 형체(인성;人性)를 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종의 흉내를 내는 정도로 그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주인이신 분이 종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종처럼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27). 또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45).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자신이 섬기심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을 섬기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때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도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만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위해서 종이 되셨습니다. 종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들을 섬기시려고 친히 종이 되신 것입니다.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으신 그분이 가장 비천하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존귀,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비우셨던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되셨다(γίνομαι)”라는 것은 어떤 상태나 위치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같은 상태로, 또는 사람과 같은 위치로 들어오셨고 그렇게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가지실 때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죄인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성, 연약해질 대로 연약해진 인성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분 자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 있는 인성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배고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인성은 신성과 결합이 되어 있기에 우리의 인성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또한 죄인의 인성을 입으셨지만, 그분 자신에게는 죄가 없으신 인성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셨지,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예수님도 우리가 같은 인간일 뿐이지 하나님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복음을 듣고, 믿고 따르고, 전하고 있습니까?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성(人性)입니다.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인 아담과 하와를 제외한 모든 인류는 부모를 통해서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다가 결국은 죽음이라고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비록 죽음을 보지 않고 옮김을 당한 사람(에녹과 엘리야)이 있기는 하지만, 저들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그분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피조물들로부터 영원한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받으셔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구원이라고 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의 신적 영광과 본질을 비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완전한 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만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종으로 오셨고, 완전한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셔도 되는 분이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같이 사셨고,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연약하셨고, 아파하셨고, 기뻐하셨고, 슬퍼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겪는 모든 것들을 다 겪으셨습니다. 다만 그분 안에 신성에 충만했기에, 그분은 죄와는 상관이 없으셨을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 높고 높은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세상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힘이 없어서 낮아지는 것은 비굴입니다. 하지만 힘이 있고 능력이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보다 힘이 없는 자를 섬기는 것은 겸손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셨고, 또한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본받고 닮아야 하는 겸손의 최고봉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본문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라고 표현했습니다. 본래 이 구절이 원문에서는 7절의 끝에 포함되어 있는데, 원문에 따라 번역하면 한 사람의 모양으로 발견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즉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진정한 사람이셨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할례를 받으셨고, 아기의 시절을 지내셨고, 유년 시절을 지내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함을 느끼셨고, 배고픔도 느끼셨습니다.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매를 맞으면 아픔도 느끼셨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과 모든 감각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고, 느끼셨습니다. 따라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자신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분명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역사와 신비로운 의미가 담겨 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출생이나, 성장의 과정이나, 그분의 모든 경험이나, 심지어 죽음까지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방식이나, 그분의 언어나, 그분의 관습도 당 시대의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이 완전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으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끝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까지 이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겸손하심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현장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십자가형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널리 시행된 것은 로마제국의 시대입니다. 이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잔인하고, 가장 모욕적인 사형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란이나 살인의 죄가 아니면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생명이신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악랄하고 잔인하고 모욕적으로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죽는다고 할지라도, 오직 예수님만은 그렇게 죽으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렇게 죽으셔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아니 죽음 자체가 예수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 가운데서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권능이 있는 자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분을 대적할만한 권력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가장 높은 그분이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피조물의 위치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죽음의 자리에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은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키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자신을 복종시키셨습니다. 그것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인만이 죽어야 하고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죽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분은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짓지도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죽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죄나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닌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고 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가 다 자신의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그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죽음, 저들의 모든 죄를 속하시려는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형벌입니다. 정상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수치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21:23).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당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면서 당하셨습니다(26:39).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 낮추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겸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겸손을 모범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전혀 죽을 만한 이유나 원인이 없지만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겸손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내 옆에 있는 성도를 위해서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나의 어디까지 양보하고 배려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만큼 손해를 감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위해서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맡기신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9:23)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광성교회의 교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이 일이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말로는 참 쉽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에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도와주시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이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먼 것처럼 느껴집니다. 너무나도 고귀해서 우리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루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다워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워집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복음의 영광이, 교회의 영광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겸손의 최고봉이신 예수님을 닮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