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

 

 

 

히브리서 118~12, 17~1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1~2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선언한 다음에 그 말씀을 증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즉 믿음의 선진들이 그 믿음을 어떻게 고백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는 이 믿음의 선진들을 영웅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들도 오늘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서는 아벨과 에녹과 노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아벨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을 준비하는 방주를 만듦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결국 저들은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으로부터는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들의 믿음과 삶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어떠한 삶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

 

 

본문 8~10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창세기 12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창세기 12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순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에는 분명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단순히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습니다(24:2).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이라고 하는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1절의 말씀을 원문에 따라 시작하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 데라가 죽음으로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았던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분명하게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이끌려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분명하게 붙잡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땅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는 이 땅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이 분명히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자기에게 약속하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떠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믿음으로 거했습니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가나안 땅은 갈대아 우르보다도, 하란보다도 척박한 땅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에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그 땅에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도 이방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했습니다.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 거했습니다. 이는 그가 가나안 땅에 자신의 최종 소망을 두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기업을 소망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작정의 부르심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부여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주권적인 부르심입니다.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순종만이 요구되는 부르심입니다.

 

 

오늘 사도는 바로 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게 합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내 믿음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내 믿음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아무런 목적도 없는 믿음, 아무런 소망도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삶을 통해서 고백할 내용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를 부르신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씨의 약속에 대한 믿음

 

 

본문 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땅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후손에 대한 것입니다. 이 약속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두 번째 약속인 후손에 대한 약속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우리 성경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사라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사도는 사라의 믿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라를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본문도 아브라함의 믿음 측면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주어질 때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자식을 바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2절에서 큰 민족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창세기 154절에서는 네 몸에서 날 자를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70을 넘었고, 사라의 나이도 60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810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고, 사라의 나이는 89세였습니다.

 

 

사라가 장막에서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사라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말하면서 웃었습니다(18:12). 사실 사라의 생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사라의 말대로라면 이들의 성적인 관계도 이미 멈추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저들의 육체는 이러한 성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나이가 많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라가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18:14).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상황을 초월하여 그 말씀하신 대로 성취하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그의 나이 99세나 되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와 역사는 사라에게도 동일하게 임했습니다.

 

 

그 결과 본문 12절에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몸이 죽은 자와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해변의 모래처럼 번성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15:5).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때때로 말도 안되는 것 같은 말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내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많이 당황해합니다. 주저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러한 상황일지라도 믿음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형편이 아닌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을 포함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이삭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본문 17~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2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2).

 

 

아브라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나 되어서 겨우 얻은 아들입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많은 후손의 씨로 주신 아들입니다. 따라서 오직 이삭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아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불로 태워서 흔적도 없애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과연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가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립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막으셨고, 이삭 대신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22:13).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해됩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순종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믿음으로라고 하는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손으로 이삭을 죽이고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그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자신은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드리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주저하지 않게 했습니다. 이 믿음이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은 훗날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 모리아 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고백한 믿음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디까지입니까? 우리는 어디까지 순종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이해하는 만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순종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해됩니까? 나는 십자가까지 순종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나의 십자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기 싫은 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한 순종으로 내 안에 있는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고백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은 그의 손에 잡힌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그는 그 약속이 이미 성취된 것처럼 살았습니다. 땅에 대한 믿음도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자손에 대한 믿음도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순종의 삶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이삭을 주시겠다고 하실 때도 순종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 하실 때도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순종은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무모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결코 보일 수 없는 순종입니다. 이 믿음과 순종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과 순종은 인간의 이성과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은 마치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따라나섰던 베드로와 그 일행들의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5:11).

 

 

아브라함은 오늘의 우리보다 불확실한 말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보다 더 분명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브라함보다 더 확실하고 견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순종의 삶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