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27)
본문 : 벧후 3:17-18
제목 : 이것을 너희가 미리 알았은즉.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만큼 볼 수 있고 아는 것만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배우지 못한 부분이나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아는 것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바르게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많이 안다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사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절대로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바르게 안 사람이야 괜찮겠지만 잘못 알게 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잘못된 지식으로 바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 병이 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아는 지식은 전통적인 것이었고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한 지식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 나서 전에 배웠던 유대교의 모든 성경지식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동안 그가 배웠던 수많은 학문들을 배설물처럼 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유대교의 성경지식은 오히려 해로운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사정없이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만큼 큰 재산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에 관한 이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고 너무나 위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리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지나간 이야기들은 몰라도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되어 질 일을 미리 안다는 것은 엄청난 유익이 되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사도를 통하여 미리 안 이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거짓선생들이 많이 들어오게 될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도 거짓선생들이 많이 들어와서 우리가 진리 안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오늘날의 교회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살기가 너무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 잘못된 대형교회들 때문에 바르게 살고 있는 우리가 잘못 산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 마치 교회는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성공하고 잘살고 누리기 위해서 다니는 곳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들을 보면 마치 교회가 화려해야 하고 엄청나게 커야 하고 마치 시장경제처럼 장사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많은 일을 해야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을 보면 마치 목사들이 인기를 누리는 스타강사처럼 보입니다.
그들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우리가 고리타분한 미신을 따르는 이단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그것이 거짓선생들이 교회에 침투해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미리 안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이 늦어지기 때문에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시지 않기 때문에 재림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셔도 우리 세대가 아닌 아주 아주 나중에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준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곧 일어날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밤이라도 오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 안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오늘 본문이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처럼 살면 안 될 것입니다.
1.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본문 17절 말씀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라고 했습니다.
굳센데서 떨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굳센 데” 라는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secure position” 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안전한 곳, 위험이 없는 곳, 튼튼한 곳, 확실한 곳, 이런 뜻을 가진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되 확실하게 하고 떨어질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걸려 있는 이 일을 아슬아슬하게 위험하게 그렇게 하지 말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기 몰아쳐도 흔들림이 없는 완전한 곳에서 신앙생활을 확실히 하라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저 남해 쪽에 한 섬에 사는 고모님 집에 놀러 가면 집이 바로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마당에 바닷물이 금방 들어올 것은 곳에다가 집을 짓고 사셨습니다.
아마 바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기 좋게 그렇게 집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겁이 많아서 그런지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옵니다.
바닷물이 슬금슬금 올라오는데 금방 방에까지 들어올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아이고 좀 힘들더라도 조금 올라가서 집을 짓고 살지 이렇게 위험하게 살까 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깊숙이 들어 와서 튼튼한 반석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하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 가장자리에서 저 맨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떨어져나갈 아슬아슬한데서 내일이라도 그만 둘 사람처럼 그렇게 위험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전 인생을 참 아슬아슬하게 산 사람입니다.
실오라기 같은 위험한 인생 줄 하나 잡고 끊어지면 어쩌나 이마저 없어지면 어쩌나 아슬아슬하게 위험천만하게 늘 걱정하며 늘 근심하며 그런 세월을 살았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아주 튼튼한 줄 하나 주시지 어찌 이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까?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요? 백그라운드가 있어요? 남다른 재주가 있어요?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 나만 홀로 이렇게 보내놓고 마음이 편하십니까?
원망도 많이 하고 불평도 많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고 나니까 그런 나의 연약함 때문에 더 하나님 의지하고 더 강한 하나님의 줄을 잡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빨리 내 연약한 인생 줄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 의지하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후회를 해봅니다.
우리가 세상은 그렇게 산다고 해도 신앙생활만큼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가까이 와서 아주 완전한 곳에서 확실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까짓 세상일이야 고생을 하면 되고 또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인생이니까 그렇게 살지만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이 신앙생활만큼은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안전하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좀 더 가까이오세요
우리 주님께로 좀 더 가까이 오세요.
끝에서 세상 바라보며 서성대지 마시고 아주 바짝 오세요.
바람이 불잖아요? 이제 폭풍이 몰려올 것인데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위험합니다.
괜찮다고요? 그래요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어요?
그러나 좀 더 안으로 들어오세요.
여기 들어와 보면 따뜻해요 여기 들어와 보면 행복해요
돈 없으면 안 쓰면 되고, 밥 없으면 굶으면 되고, 그러다가 죽으며 천국가면 되고
남들이 비웃으면 같이 나도 속으로 웃으면 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명하게 살면 되고,
우리 주님이 날 알아주시면 되고 우리 주님이 날 인정해 주시면 되니까 걱정 말고 주님께 가까이 안전한 곳으로 오세요.
우리가 굳센데서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은 무법한 자들이 미혹 때문에 그들에게 이끌려 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법한 자들'이란 베드로 사도가 지금까지 말한 거짓 교사들, 조롱하는 자들, 무식하고 굳세지 못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별 무서워할 줄을 모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사도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이라고 한다면 그 말씀 앞에 벌벌 떨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함부로 대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는 일은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법한 자들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해석을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해석을 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웃기는 설교자들을 보면 정말로 기가 막힙니다.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 하고 자기의 뜻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짜깁기 식으로 인용을 합니다.
이런 거짓선생들이 있는 한 우리는 정말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기도 하지만 성경의 진리 십자가의 복음 천국복음을 바르게 아는 우리는 넘어 갈 수도 없고 넘어 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본문 18절 말씀 중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것도 다행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성장을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신앙 성장하는 신앙은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데 두 가지의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를 시작할 때와 베드로 후서를 시작할 때에도 같은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복을 빈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더 많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 가운데서 더 많이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란 제일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를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내 스스로 선한 일을 하여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참 착한 사람 같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은혜 하고 부르짖으면서 생각은 은혜를 떠나는 사람처럼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선행이나 고행을 많이 함으로 그것을 자랑하고 칭찬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은혜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없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의 부족함을 나의 죄악을 그 앞에 내어놓는 것이 은혜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면 알수록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것이 그리스도와 관련된 지식이 아니면 별 유익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고 많은 지식들을 쌓았지만 그 지식들이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배설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말씀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발견이 되어져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발견이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그 자비하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떠난 것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이 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신앙이 성장했다고 하면 교회에 출석하는 횟수가 늘었다, 기도하는 시간이 늘었다, 선행을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하고, 헌금 액수가 늘고, 이런 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바르게 알고 체험한다면 그런 현상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앙의 성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성장은 어느 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 성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바르게 지속적으로 성장을 하려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바르게 알고 그 진리의 핵심인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그 안에 있는 한없는 은혜를 바르게 알 때 참된 신앙의 성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은 생명력이 있는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성장을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표어처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멈추지 않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본문 18절 하반 절에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지금이나 영원한 날까지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있기를 기원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영원한 날은 문자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시는 그날 우리가 주님의 영화로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 그 위엄 그 거룩하심을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그날까지 영광이 주님께만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잘 해 주시니까 맞먹으려고 합니다.
아주 쉽게 이름을 부르고 아주 쉬운 상대로 보고 우리와 비슷하게 상상을 해버립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그날의 영광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예수님 비슷하게 행세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많은 영광을 받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거룩한 척 하는지 얼마나 잘난 척 하는지 얼마나 대접을 잘 받으려고 하는지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직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오직 영광은 우리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영원무궁토록 우리주님께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려고 거짓선생들이 많이 활동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굳센데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아는 지식 안에서 날마다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후 3:17-18
제목 : 이것을 너희가 미리 알았은즉.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만큼 볼 수 있고 아는 것만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배우지 못한 부분이나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아는 것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바르게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많이 안다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사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절대로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바르게 안 사람이야 괜찮겠지만 잘못 알게 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잘못된 지식으로 바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 병이 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아는 지식은 전통적인 것이었고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한 지식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 나서 전에 배웠던 유대교의 모든 성경지식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동안 그가 배웠던 수많은 학문들을 배설물처럼 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유대교의 성경지식은 오히려 해로운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사정없이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만큼 큰 재산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에 관한 이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고 너무나 위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리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지나간 이야기들은 몰라도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되어 질 일을 미리 안다는 것은 엄청난 유익이 되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사도를 통하여 미리 안 이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거짓선생들이 많이 들어오게 될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도 거짓선생들이 많이 들어와서 우리가 진리 안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오늘날의 교회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살기가 너무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 잘못된 대형교회들 때문에 바르게 살고 있는 우리가 잘못 산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 마치 교회는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성공하고 잘살고 누리기 위해서 다니는 곳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들을 보면 마치 교회가 화려해야 하고 엄청나게 커야 하고 마치 시장경제처럼 장사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많은 일을 해야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을 보면 마치 목사들이 인기를 누리는 스타강사처럼 보입니다.
그들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우리가 고리타분한 미신을 따르는 이단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그것이 거짓선생들이 교회에 침투해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미리 안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이 늦어지기 때문에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시지 않기 때문에 재림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셔도 우리 세대가 아닌 아주 아주 나중에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준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곧 일어날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밤이라도 오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 안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오늘 본문이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처럼 살면 안 될 것입니다.
1.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본문 17절 말씀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라고 했습니다.
굳센데서 떨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굳센 데” 라는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secure position” 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안전한 곳, 위험이 없는 곳, 튼튼한 곳, 확실한 곳, 이런 뜻을 가진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되 확실하게 하고 떨어질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걸려 있는 이 일을 아슬아슬하게 위험하게 그렇게 하지 말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기 몰아쳐도 흔들림이 없는 완전한 곳에서 신앙생활을 확실히 하라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저 남해 쪽에 한 섬에 사는 고모님 집에 놀러 가면 집이 바로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마당에 바닷물이 금방 들어올 것은 곳에다가 집을 짓고 사셨습니다.
아마 바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기 좋게 그렇게 집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겁이 많아서 그런지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옵니다.
바닷물이 슬금슬금 올라오는데 금방 방에까지 들어올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아이고 좀 힘들더라도 조금 올라가서 집을 짓고 살지 이렇게 위험하게 살까 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깊숙이 들어 와서 튼튼한 반석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하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 가장자리에서 저 맨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떨어져나갈 아슬아슬한데서 내일이라도 그만 둘 사람처럼 그렇게 위험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전 인생을 참 아슬아슬하게 산 사람입니다.
실오라기 같은 위험한 인생 줄 하나 잡고 끊어지면 어쩌나 이마저 없어지면 어쩌나 아슬아슬하게 위험천만하게 늘 걱정하며 늘 근심하며 그런 세월을 살았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아주 튼튼한 줄 하나 주시지 어찌 이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까?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요? 백그라운드가 있어요? 남다른 재주가 있어요?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 나만 홀로 이렇게 보내놓고 마음이 편하십니까?
원망도 많이 하고 불평도 많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고 나니까 그런 나의 연약함 때문에 더 하나님 의지하고 더 강한 하나님의 줄을 잡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빨리 내 연약한 인생 줄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 의지하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후회를 해봅니다.
우리가 세상은 그렇게 산다고 해도 신앙생활만큼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가까이 와서 아주 완전한 곳에서 확실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까짓 세상일이야 고생을 하면 되고 또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인생이니까 그렇게 살지만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이 신앙생활만큼은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안전하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좀 더 가까이오세요
우리 주님께로 좀 더 가까이 오세요.
끝에서 세상 바라보며 서성대지 마시고 아주 바짝 오세요.
바람이 불잖아요? 이제 폭풍이 몰려올 것인데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위험합니다.
괜찮다고요? 그래요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어요?
그러나 좀 더 안으로 들어오세요.
여기 들어와 보면 따뜻해요 여기 들어와 보면 행복해요
돈 없으면 안 쓰면 되고, 밥 없으면 굶으면 되고, 그러다가 죽으며 천국가면 되고
남들이 비웃으면 같이 나도 속으로 웃으면 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명하게 살면 되고,
우리 주님이 날 알아주시면 되고 우리 주님이 날 인정해 주시면 되니까 걱정 말고 주님께 가까이 안전한 곳으로 오세요.
우리가 굳센데서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은 무법한 자들이 미혹 때문에 그들에게 이끌려 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법한 자들'이란 베드로 사도가 지금까지 말한 거짓 교사들, 조롱하는 자들, 무식하고 굳세지 못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별 무서워할 줄을 모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사도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이라고 한다면 그 말씀 앞에 벌벌 떨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함부로 대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는 일은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법한 자들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해석을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해석을 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웃기는 설교자들을 보면 정말로 기가 막힙니다.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 하고 자기의 뜻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짜깁기 식으로 인용을 합니다.
이런 거짓선생들이 있는 한 우리는 정말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기도 하지만 성경의 진리 십자가의 복음 천국복음을 바르게 아는 우리는 넘어 갈 수도 없고 넘어 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본문 18절 말씀 중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것도 다행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성장을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신앙 성장하는 신앙은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데 두 가지의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를 시작할 때와 베드로 후서를 시작할 때에도 같은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복을 빈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더 많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 가운데서 더 많이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란 제일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를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내 스스로 선한 일을 하여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참 착한 사람 같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은혜 하고 부르짖으면서 생각은 은혜를 떠나는 사람처럼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선행이나 고행을 많이 함으로 그것을 자랑하고 칭찬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은혜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없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의 부족함을 나의 죄악을 그 앞에 내어놓는 것이 은혜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면 알수록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것이 그리스도와 관련된 지식이 아니면 별 유익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고 많은 지식들을 쌓았지만 그 지식들이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배설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말씀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발견이 되어져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발견이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그 자비하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떠난 것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이 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신앙이 성장했다고 하면 교회에 출석하는 횟수가 늘었다, 기도하는 시간이 늘었다, 선행을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하고, 헌금 액수가 늘고, 이런 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바르게 알고 체험한다면 그런 현상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앙의 성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성장은 어느 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 성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바르게 지속적으로 성장을 하려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바르게 알고 그 진리의 핵심인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그 안에 있는 한없는 은혜를 바르게 알 때 참된 신앙의 성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은 생명력이 있는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성장을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표어처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멈추지 않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본문 18절 하반 절에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지금이나 영원한 날까지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있기를 기원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영원한 날은 문자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시는 그날 우리가 주님의 영화로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 그 위엄 그 거룩하심을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그날까지 영광이 주님께만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잘 해 주시니까 맞먹으려고 합니다.
아주 쉽게 이름을 부르고 아주 쉬운 상대로 보고 우리와 비슷하게 상상을 해버립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그날의 영광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예수님 비슷하게 행세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많은 영광을 받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거룩한 척 하는지 얼마나 잘난 척 하는지 얼마나 대접을 잘 받으려고 하는지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직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오직 영광은 우리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영원무궁토록 우리주님께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려고 거짓선생들이 많이 활동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굳센데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아는 지식 안에서 날마다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