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24)
본문 : 벧후 3:11-13
제목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의 개념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많이 다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복의 개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소유에서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자식들을 많이 두고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무소유를 복이라고 하십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된 것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소유해야 하느냐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여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성도들 즉,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실 때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사람들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재림을 기다리는 산 믿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반드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오늘 본문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풀어지리니”라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에도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일어나게 될 현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풀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모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물질을 원소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원소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요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에 타서 녹아지는데 물질을 이루고 있는 기본 요소까지 다 녹아서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예 형체도 없이 녹아져서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이렇게 녹아져서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기치관이나 목표나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녹아져서 없어질 것을 아는 사람들이 녹아지고 없어질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매달려서 아옹다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녹아서 없어질 그런 것 많이 가진 사람 부러워하면서 그런 것 못 가졌다고 원망불평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녹아서 없어질 것들 때문에 이렇게 좋은 영원한 생명을 등한시 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따라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그런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생활방식, 거룩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너무나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거룩하다고 할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따로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임 받는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잘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잘 모르고 삽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해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고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길이길이 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세상을 사는 것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분이 다른데 왜 그런 같잖은 사람들처럼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런 사람들처럼 사느냐는 것입니다.
“경건함으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경건하다는 말의 뜻이 공경하고, 삼가고, 엄숙한 것을 말합니다.
이 중에 교회에서 선호하는 뜻은 아마도 엄숙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경건한 예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경건이라는 단어는 유세베이아(ευσεβεια)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올은 바른 이라는 뜻을 가진 유(ευ)라는 단어와 예배를 뜻하는 세보(σεβω)라는 단어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에서 경건이라는 단어는 바른 예배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조용하고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좋은 예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동양인들은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이란 그런 예배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진정으로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용하게 눈을 감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은데 아무런 마음의 감정도 없이 그냥 졸리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예배를 감상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나 보기나 하고 찬양대가 어떻게 노래하나 감상이나 하고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가 평가나 하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그런 엄숙한 것을 흉내 내지 말고 경쾌하게 예배를 드리고 축제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함께 해야 참된 예배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왔다가 구경만하고 감상만 하고 딴생각이나 하고 졸기나 하고 출석만 하고 가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안 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늘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장관까지 지낸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문학가 이어령 씨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 있는데 전에 사서 조금 읽고 두었는데 이번에 한꺼번에 거의 다 읽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유명한 작가가 쓴 글이라 그 감동에 젖어서 다 읽어버렸습니다.
그 책에 그가 70이 넘은 후에 기독교로 회심하게 된 계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사랑하는 딸이 눈에 병이 걸려서 실명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미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세상을 못 보게 되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 딸이 교회에 나가는데 한번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고 합니다.
평생을 가자고 해도 안 따라 갔지만 앞을 못 보게 될 딸이 가자고 하니까 거절할 수 없고 또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심정으로 교회를 갔다고 합니다.
미국에 있는 아주 작은 교회 세를 얻은 작은 공간에 피아노도 없고 적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같고 서로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주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자고 예배를 잘 드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사람들만이 아닌 하나님께서 바로 보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바로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지함이 없는 형식적인 것이라면 세상에 나가서 사는 삶의 모습은 볼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예배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예배적인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잘 드려야 삶도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본문 12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날이 오리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다는 말 속에는 재촉하고 서두르고 빨리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 재림이 하루 속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빨리 오시도록 애타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구할 때도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 8:17).”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63:1)
기도를 할 때도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야고보서 5:17)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편 119:20)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편 119:131)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편 19:10)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오늘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3.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본문 13절 말씀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날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준비해 주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을 “의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 “의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정의가 깃들여 있는”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만이 들어가 사는 곳”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이 “의가 있는 곳”의 “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로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하늘과 새 당에는 의로운 사람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의는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따라서 의로운 사람만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워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의의 기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가 그 의의 기준에 합격을 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선하게 살아야지 믿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에 타서 녹아져버리고 우리의 원래 속 모습만 나타나게 될 때에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흉악한 죄인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정말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야 나는 좋은 일을 많이 했어 그런 자신을 가진 사람이나 나는 정말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어. 남에게 잘못한 것도 너무 많아 이런 사람도 똑 같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죄가 조금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흉악한 죄인이었다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 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을 가진 자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의”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통치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엔 공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한 사회 모든 사람들이 다 동등한 대우를 받는 사회라고 말하지만 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을 공평하게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른다고 하지만 그 시험이 머리가 나쁜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불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잘 해서 실력이 좋아지지만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빠서 아무리 공부를 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머리 나쁜 사람들 실력이 없는 사람들 편에서 보면 현재의 입시제도나 입사제도는 아주 불공편한 것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좋은 물건 쌓아놓고 공평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돈이라는 것을 받고 줍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보면 이 제도는 참 공평한 것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돈도 잘 못 버는 사람들이 보면 이 제도는 너무나 불공평한 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물이 잘 나서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좋아서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가서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당은 이러한 불공평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나라 조금도 차별이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행복한 나라 그 나라가 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귀한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멋있게 살게 될 그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그 곳을 바라보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후 3:11-13
제목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의 개념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많이 다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복의 개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소유에서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자식들을 많이 두고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무소유를 복이라고 하십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된 것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소유해야 하느냐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여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성도들 즉,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실 때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사람들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재림을 기다리는 산 믿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반드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오늘 본문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풀어지리니”라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에도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일어나게 될 현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풀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모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물질을 원소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원소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요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에 타서 녹아지는데 물질을 이루고 있는 기본 요소까지 다 녹아서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예 형체도 없이 녹아져서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이렇게 녹아져서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기치관이나 목표나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녹아져서 없어질 것을 아는 사람들이 녹아지고 없어질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매달려서 아옹다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녹아서 없어질 그런 것 많이 가진 사람 부러워하면서 그런 것 못 가졌다고 원망불평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녹아서 없어질 것들 때문에 이렇게 좋은 영원한 생명을 등한시 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따라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그런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생활방식, 거룩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너무나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거룩하다고 할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따로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임 받는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잘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잘 모르고 삽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해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고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길이길이 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세상을 사는 것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분이 다른데 왜 그런 같잖은 사람들처럼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런 사람들처럼 사느냐는 것입니다.
“경건함으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경건하다는 말의 뜻이 공경하고, 삼가고, 엄숙한 것을 말합니다.
이 중에 교회에서 선호하는 뜻은 아마도 엄숙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경건한 예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경건이라는 단어는 유세베이아(ευσεβεια)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올은 바른 이라는 뜻을 가진 유(ευ)라는 단어와 예배를 뜻하는 세보(σεβω)라는 단어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에서 경건이라는 단어는 바른 예배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조용하고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좋은 예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동양인들은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이란 그런 예배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진정으로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용하게 눈을 감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은데 아무런 마음의 감정도 없이 그냥 졸리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예배를 감상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나 보기나 하고 찬양대가 어떻게 노래하나 감상이나 하고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가 평가나 하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그런 엄숙한 것을 흉내 내지 말고 경쾌하게 예배를 드리고 축제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함께 해야 참된 예배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왔다가 구경만하고 감상만 하고 딴생각이나 하고 졸기나 하고 출석만 하고 가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안 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늘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장관까지 지낸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문학가 이어령 씨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 있는데 전에 사서 조금 읽고 두었는데 이번에 한꺼번에 거의 다 읽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유명한 작가가 쓴 글이라 그 감동에 젖어서 다 읽어버렸습니다.
그 책에 그가 70이 넘은 후에 기독교로 회심하게 된 계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사랑하는 딸이 눈에 병이 걸려서 실명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미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세상을 못 보게 되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 딸이 교회에 나가는데 한번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고 합니다.
평생을 가자고 해도 안 따라 갔지만 앞을 못 보게 될 딸이 가자고 하니까 거절할 수 없고 또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심정으로 교회를 갔다고 합니다.
미국에 있는 아주 작은 교회 세를 얻은 작은 공간에 피아노도 없고 적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같고 서로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주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자고 예배를 잘 드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사람들만이 아닌 하나님께서 바로 보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바로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지함이 없는 형식적인 것이라면 세상에 나가서 사는 삶의 모습은 볼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예배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예배적인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잘 드려야 삶도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본문 12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날이 오리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다는 말 속에는 재촉하고 서두르고 빨리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 재림이 하루 속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빨리 오시도록 애타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구할 때도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 8:17).”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63:1)
기도를 할 때도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야고보서 5:17)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편 119:20)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편 119:131)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편 19:10)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오늘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3.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본문 13절 말씀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날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준비해 주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을 “의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 “의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정의가 깃들여 있는”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만이 들어가 사는 곳”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이 “의가 있는 곳”의 “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로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하늘과 새 당에는 의로운 사람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의는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따라서 의로운 사람만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워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의의 기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가 그 의의 기준에 합격을 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선하게 살아야지 믿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에 타서 녹아져버리고 우리의 원래 속 모습만 나타나게 될 때에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흉악한 죄인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정말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야 나는 좋은 일을 많이 했어 그런 자신을 가진 사람이나 나는 정말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어. 남에게 잘못한 것도 너무 많아 이런 사람도 똑 같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죄가 조금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흉악한 죄인이었다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 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을 가진 자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의”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통치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엔 공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한 사회 모든 사람들이 다 동등한 대우를 받는 사회라고 말하지만 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을 공평하게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른다고 하지만 그 시험이 머리가 나쁜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불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잘 해서 실력이 좋아지지만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빠서 아무리 공부를 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머리 나쁜 사람들 실력이 없는 사람들 편에서 보면 현재의 입시제도나 입사제도는 아주 불공편한 것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좋은 물건 쌓아놓고 공평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돈이라는 것을 받고 줍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보면 이 제도는 참 공평한 것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돈도 잘 못 버는 사람들이 보면 이 제도는 너무나 불공평한 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물이 잘 나서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좋아서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가서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당은 이러한 불공평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나라 조금도 차별이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행복한 나라 그 나라가 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귀한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멋있게 살게 될 그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그 곳을 바라보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