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행복자
요한복음 19장 23~30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일들 가운데 때때로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분명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는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의 명분이나 일의 순서, 또는 그 일의 결과의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은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만날 때, 많이 당황해합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말로 설명이 잘 안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고, 세상이 지혜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또 사람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상식적인 내용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이해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일을 믿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믿습니다. 이는 우리의 이해력과 하나님의 뜻이나 역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서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오직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이 완성되는 장면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진행된 자기 백성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모습이다.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세례요한이 고백한 대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요1:29).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사도 요한과 몇 명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 함께했던 제자들도 다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수많은 이적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한때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환호성을 질렀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향하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마21:9, 27:40).
이 시간 우리는 약 2,000년 전, 그 골고다 언덕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 자신을 세워보기 원합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시선에 그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습니까? 채찍에 맞아 만신창이가 되어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있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비참한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오늘 우리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극단적인 두 표현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는 고독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행복한 예수님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두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지금 저 예수님에게는 이 단어가 함께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고독한 행복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 고독한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을 받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군인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가시로 만든 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러고는 이곳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토록 비참한 모습이 되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토록 처참한 형틀에 매달려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은 왜 당신의 아들을 이런 지경까지 내버려두셨을까요? 하나님이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일반적인 인간보다 못한 모습까지 내려가도록 하셨을까요? 과연 이 장면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는 아주 특별한 형틀입니다. 거기에 매달려 있는 죄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버림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는 발을 땅에 디딜 수가 없습니다. 땅에서 들려있기에 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하늘에 속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신명기 23장 23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토록 저주받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류의 죄와 그의 결과 때문입니다. 즉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4편 3절에서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3:10). 결국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러한 죄인으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롬3:23). 뿐만 아니라 그 죄의 결과로 인해 영원한 사망 아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롬6:23).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인류 가운데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그 죄로 인해 그 누구보다 더럽고 추한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죄가 아닌 자기 백성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영원 전에 선택된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렸고,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고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기에 그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그 아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죄를 간과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외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마27:46).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분의 고통을 느껴보셨습니까? 그분의 고독을 맛보셨습니까? 예수님의 이 고통과 고독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내가 당해야 하는 고통입니다. 내 죄의 크기가 너무나도 커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데 예수님이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고독은 바로 내가 겪어야 하는 고독입니다. 세상도 외면하고, 하나님도 외면하심으로 내가 맛보아야 하는 고독입니다. 그런데 그 고독을 예수님이 대신 겪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로 인한 고통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로 인해 하늘과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느껴야 하는 고독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시고 고독하게 되신 목적이었습니다.
Ⅱ.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역설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분명 십자가 형틀입니다. 고통입니다. 저주입니다. 고독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불행한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불행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억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원하신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잠시 비워두시고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다 아시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선택하셨던 자기 백성의 구원이라고 하는 역사가 완성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그래서 비록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예수님은 행복합니다.
1.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게 고백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 양(ἀμνός)”은 ‘그 어린 양’입니다. 그리고 이는 구약의 제사에 등장하는 어린 양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린 양은 특별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 짐승이 어린 양이었습니다(창22:13).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날 저녁에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었던 짐승이 어린 양이었습니다(출12장).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대표적인 짐승이 어린 영이었습니다. 결국 어린 양은 하나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는 양입니다. 특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관련해서 하나님께 드렸던 짐승이 바로 어린 양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바로 그 어린 양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어린 양,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그 어린 양,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었던 그 어린 양,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죽었던 그 어린 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그러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엡1:3),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백성(행13:48),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그 백성(요6:37). 바로 백성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백성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고 오는 세대의 자기 백성들의 그 모든 죄와 그 결과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당신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자기 백성들을 보시고 행복해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로 오늘의 나를 보시면서 행복해하신 것입니다. 나는 씻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버림을 받을 자요, 영원한 심판에 이를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 영원한 죄와 사망에서 건져냄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것이 그 고독한 예수님이 느끼는 행복이었습니다.
2.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죽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뜻”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뜻입니다.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40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이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분명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분명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그 십자가와 부활을 이기심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비록 십자가에서 그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행복하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예수님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행복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행복은 철저하게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에서 완성되는 일로 인한 것입니다.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십자가라고 하는 형틀에 매달려 있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성취되기에 예수님은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독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행복하십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온전하게 조화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 나를 위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배반을 당하시고 끝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그러한 죽음도 아닙니다. 이 죽음이야말로 위대한 죽음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의 이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분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분께 경배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