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의 진리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에 대하여 너무나도 어렵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구원을 얻는 방법이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을 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는가?” 이 질문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을 최고로 여기는 불신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모습에 대하여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 2장이나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사건을 전후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역사적으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저마다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탄생을 기정사실로 하고 난 후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바로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켜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는 데는 역사적인 사실도 필요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하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을 사실로서만 그친다면 그것도 또한 올바른 신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 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성육신의 진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말씀이 육신이 된 진리입니다.
본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λόγος)”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언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요1:1). 또한 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1:3).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1:4). 그리고 이 말씀은 참 빛이라고 했습니다(1:4). 그리고 이 참 빛이신 말씀이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1:9).
그렇다면 이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또 놀라운 말씀입니까?
또한 본문에서 “되었다(γίνομαι)”라는 것은 단번에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①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육신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②분명 육신을 가지고 사람으로 오셨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대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죄인의 모양으로 오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④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심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7).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神性)께서 인간(肉身)이 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죄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출33:20).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본성 그대로를 인간에게 보여주시지 않고 육신의 모양을 하시고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당신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죄인으로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친히 죄인들에게 볼 수 있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의 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이신 분이 그 피조물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의 모양을 하고 죄의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영역 밖에 있는 분이 인간의 영역 안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신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토록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독생자를 죄인의 몸으로 내려보내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이것이 성육신의 진리, 곧 위대한 성탄의 진리입니다.
Ⅱ.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진리입니다.
본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은 바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한다(σκηνόω)”라는 말은 장막으로 거하심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장막과 같은 인간의 몸에 임시로 머물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하던 때, 광야에 세웠던 성막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즉 광야에 세워졌던 성막은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성막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실제가 오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의 실제이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고 함께하시기 위해서 성막의 제도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주신 것은 그곳에서 그 백성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바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성막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막과 33년의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광야 성막의 완전한 성취였던 것입니다.
광야의 성막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성막은 광야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이 세상에서 33년 동안 육신에 잠시 거하시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빌리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시고, 말구유를 요람으로 삼으시고, 목수의 아들로 자라시고, 그리고 갈릴리에서 자라신 것,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시면서 생활하신 것, 무덤조차도 남의 것을 빌려 쓰신 것 등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을 입으신 삶이 임시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막은 외적으로 초라하고 볼품이 없고 매력을 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나사렛 예수의 외모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었습니다. 풍채도 없었습니다. 흠모할 만한 아무런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사53:2). 따라서 유대인들의 눈에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의 촌부로만 보였습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한낱 목수의 아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막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광야의 성막은 열두 지파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성막 위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성막에 임재하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온 세계 중 이스라엘 한 가운데서 생활하셨습니다. 이 땅에 많은 민족과 나라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광야의 성막에서 하나님은 친히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출25:21f). 다만 죄인들의 손에 있는 짐승의 피와 중보자인 제사장을 통하여 만나셨습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이 성막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는 중보자이십니다.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요14:6). 이제 구약의 제사장이 중보자가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딤전2:5).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기 위하여 성막을 세우시고 그 가운데 거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모양을 하시고, 우리와 같은 환경 속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고,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교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과 함께하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시고 죄인의 구주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영원한 임마누엘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성육신의 진리, 위대한 성탄의 진리입니다.
Ⅲ.영광이 충만한 진리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신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도 요한의 눈에는 그 모습이 보통 인간의 모습이 아닌 영광의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니(θεάομαι)”라는 단어는 ‘아주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변화산에서 영광의 광채를 띠는 모습으로 변모되심을 경험한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광채를 보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선포되었습니다(마17:1~8).
그런데 요한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예수님의 육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神性)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와 진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삼하2:6). 그렇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동일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성품을 완전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먼저는 은혜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χάρις)”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마치 태양 빛을 온누리에 비춰주시듯이, 맑은 공기를 죄인과 의인에게 골고루 주시듯이, 모든 만물에 물을 공급해 주시듯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은혜”는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죄인을 영원한 멸망에서 값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를 사해 주시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은혜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장막에서의 삶과 같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추악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위하여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이 은혜를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진리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진리입니다(요14:6).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이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오늘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심이 진리입니다.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심이 진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는 논리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이는 과학적인 진리도 아닙니다. 이는 문학적인 진리도 아닙니다. 이는 도덕적인 진리도 아닙니다. 이는 수학으로 계산이 되는 진리도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되는 진리는 더욱 아닙니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진리입니다. 이는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구원을 주는 위대한 복음의 진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성품 속에 있는 영광을 죄인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은혜와 진리의 충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성육신의 진리, 곧 위대한 성탄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는 사람이 짐승이 되는 것보다 더 큰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진리입니다. 역사적 사실이요, 또한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아름다운 진리입니다(딤전1:15).
성육신의 진리! 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진리입니다.
성육신의 진리!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진리입니다.
성육신의 진리!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앞에 머리를 숙여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가진 우리는 정말 위대한 자들이 아닙니까? 이 위대한 진리가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이 진리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이 진리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