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들어갈 안식

 

 

히브리서 315~19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성도 여러분! 지금 사도는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는 일에 대한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을 대한 불신앙이 얼마나 위험하고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졌던 자가 현실 속에서 만나는 어려움으로 인해 그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고백한 우리가 그 믿음의 길을 버리고 떠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대속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돌아가실 때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3절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믿음의 대열에서 이탈한다면 예수님의 이 약속은 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앞에서 해 온 말씀들의 반복입니다. 따라서 색다른 내용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당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익히 들었고,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다시 그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 시대의 교회들이 맞이한 상황이 심각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시급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해결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성도, 그리고 온 땅에 확산하여야 하는 복음에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상황입니다. 세상의 온갖 이론들이 복음을 부정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본주의 사상들이 교회가 주장하는 신본주의를 공격합니다. 세상은 온갖 화려한 것들이 성도들의 눈과 귀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자들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 더 영광스럽고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안식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를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오직 우리의 믿음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을 통해서 이 안식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였던 그 어리석은 모습을 다시 한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요,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영원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믿음으로 들어갈 안식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성경에 일렀으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말하여진 대로, 성경에 선포된 대로라는 뜻입니다. 지금 사도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자신의 말이나 뜻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내용은 철저하게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이미 앞의 7~8절에서 인용했던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지금 이 말씀을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도가 지금부터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경고하고자 하는 내용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저 옛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습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태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상태를 가리켜 완고했다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들의 말씀 앞에 완고함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결과 저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는 겸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이나 뜻으로 헤아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논리나 방법으로 검증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결코 우리가 거기에서 제하거나 더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가 취할 자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주인이 되어서 나 자신을 통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내 삶에서 살아내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닌 강연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아닌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펼치는 강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비록 성경을 펼쳐놓고 읽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의 중심을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설교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아무리 연륜이 깊어도,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그것이 말씀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러한 사람들의 말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감동을 주고, 삶의 활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언제나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풀어주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권면하는 설교자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말씀 앞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 이스라엘

 

오늘 분몬 16절에서 18절의 말씀은 세 개의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이 질문의 형식을 가지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교육법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이나 강조에 강조를 더하고자 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해답을 몰라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 해답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을 듣는 자들은 이 외에 다른 그 어떤 해답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자들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은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 곧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서 사도는 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의 성도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로 하고 있다고 제시합니다. 따라서 과거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버리고 성도의 대열에서 이탈한다면 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결과를 맞이할 것임을 강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자

본문 16절에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했던 자들은 바로 모세의 인도를 따라 출애굽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행하신 10가지 재앙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저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으로 건너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저들은 광야에서 이방인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이적들을 경험했습니다. 나아가 저들은 시내산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한 주범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듣고(κούσαντες)”들었을 때, 들어서 알았을 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단지 청각을 통해서 들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한 것은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격노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2.하나님이 노하신 자 광야에서 범죄한 자

본문 17절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노하셨다(προσώχθισεν)”라는 것은 심히 불쾌하게 여겼다라는 뜻으로 앞의 10절에서도 등장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사용된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심으로 인해 광야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시험했던 자들이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범죄했다(μαρτήσασιν)”라는 것은 죄를 짓다, 목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이 범죄를 무지(無知)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깨뜨리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지 못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더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국 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심지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하셨는데, 저들은 이를 거역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분의 권위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광야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하나님의 안식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자 순종하지 아니한 자

본문 18절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맹세라고 하는 표현을 통해서 저 불신앙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맹세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의 잘못된 맹세의 관습을 책망하셨는데(5:33~37), 이는 그 당시에도 맹세의 관습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시행되고 있었음을 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한 맹세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일반적인 사람들의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맹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품적으로 말을 쉽게 뱉고 바꾸시지 않습니다(23:19). 그분은 시간이나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으십니다(1:17).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께서 맹세로 확증하셨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결정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든지 결정한 일에 대해서 변경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지하신 하나님의 결정은 결코 바뀌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맹세까지 하셨다면 이는 결코 변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의 모습을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 곧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이 세 가지의 질문은 하나의 내용입니다. 비록 세 번에 걸쳐서 각각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말씀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단코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니고, 아무리 많은 봉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없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의 삶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천국, 곧 안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믿음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 믿음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본문 19절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3장 전체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데 실패한 저 광야 시대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바로 불신앙(πιστία)”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는데, 하나님에 대한 저들의 영적인 상태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저들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둘 모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안식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도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에게 불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랬듯이, 만약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서 떠난다면 그도 예수님이 준비하신 안식에 결단코 동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들과 동일한 결과에 처해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외에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안식을 위해 준비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우리를 영접하시고 우리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다시 오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그 안식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는 세대였습니다. 저들은 완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위해서 최고의 것을 약속하셨고,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분수에 넘치는 것이요, 차고 넘치는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가나안 땅, 안식)을 받을 수도 없었고 누릴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넉넉히 주시고자 했지만, 저들은 그것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떠합니까? 지금이라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고백이 있습니까? 나는 오늘이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까? 나는 그 천국에 들어가는 소망을 인해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다같이 동참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