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탄생
이사야 9장 1~7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할렐루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몸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모든 성도에게 예수님의 평강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약 700년경에 활동하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조국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회복과 메시야를 또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또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7장 14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탄생은 임마누엘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메시야의 사역이 가지는 의미와 통치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를 예언하면서 그 메시야가 행하실 구원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장차 오실 메시야는 아주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지만 그는 분명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이 예언은 신약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을 당신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메시야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Ⅰ.흑암을 비취는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1~2절에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2절에서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은 역사적으로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은 지역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로 사사시대를 지나오면서 이방 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았습니다. 이는 이방 민족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아직 정비가 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성막이 세워져 있는 중부지방이었기 때문에 저 북부지방에 있는 지파들은 아무래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방들은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 군사적으로도 정비된 체제였습니다. 따라서 이방 민족들이 이들의 접경을 침범해도 저들을 막아낼 힘이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도 잦았고 압제도 많았던 땅이 바로 이 갈릴리 지방입니다.
또한 이사야가 하나님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는 지금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고, 특히 갈릴리 지역은 거의 초토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이방에게 멸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었고, 이방의 문화가 혼합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 갈릴리 지역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도 외면을 받았고,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 시대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날이 밝을 때는 이토록 흑암이 가장 깊었던 이 땅에 빛이 가장 먼저 비취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절에 보면 이러한 고통의 땅에서 흑암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멸시의 땅이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장차 메시야 오게 되면 이 땅이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깊고 깊은 흑암의 땅에 빛이 비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큰 빛”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의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행하심으로 완전하게 성취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사시면서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본문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적을 행하신 곳도 갈릴리입니다(요2:1-11). 예수님께서 맨 처음 회당에서 가르치신 곳도 갈릴리입니다(눅4:14- 17).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신 곳도 갈릴리 해변이었습니다(마4:17). 이처럼 이 갈릴리 지역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고, 외면을 받았던 흑암의 땅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가장 영화로운 땅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흑암을 비취는 빛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9장 5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분명 어두움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어두움의 땅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빛의 세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그 어떤 어두움의 세력이라도 몰아내시는 능력이 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결코 빛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치는 모든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가고야 맙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빛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탄의 빛은 바로 이 사회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합니다. 이 성탄의 빛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랑이 넘치게 되고 소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직도 이 사회에 어두운 곳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야 합니다. 성탄의 소식을 저들에게 전하고 저들도 그 빛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두움 속에서 신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Ⅱ.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본문 3절에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나라가 창성케 된다”라는 것은 백성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즉 나라가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지고 그로 인하여 나라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행복이 넘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 즉 나라가 창성케 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은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일어나는 아주 특징적인 현상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러한 평안과 행복이 넘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에 인간은 죄로 인하여 고통과 흑암만이 있었습니다. 멸시와 천대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 대신 이 모든 멸시와 천대를 당하시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평안과 행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메시야는 자기 백성들을 압제하는 모든 원수를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멍에, 채찍, 막대기”는 모두가 다 노예를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이토록 노예의 삶을 살았음을 가리킵니다. 특히 저 갈릴리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앗수르에게 멸망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서 이방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억압받는 삶이요, 멸시를 당하는 삶이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차 오실 메시야는 그 옛날 애굽의 속박을 꺾어버리시고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것과 같이 이방의 압제로부터, 원수들의 압제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자기 백성의 영원한 구원을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예수의 탄생에 대하여 전달하면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해 놓으신 그 백성,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구별해 놓으신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대상일 뿐이지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 죄인들 가운데서 얼마를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저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이 메고 있는 죄악의 멍에를 대신 져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학대하는 죄악의 채찍을 대신 맞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압제하는 사단의 막대기를 꺾어버리십니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원수들의 모든 속박을 무너뜨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메시야의 이러한 자기 백성의 구원 사역은 바로 그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사건이 됩니다. 본문 5절에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전쟁에서 대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그들의 군복을 불에 태워버림으로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었음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은 대적들은 완전히 패망했음을 의미하고,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창3:1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실 때(요19:30), 사단의 머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영원히 패망하게 되었고, 다시는 저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저들의 영원한 멸망을 차마 보지 못하셔서, 그들을 영원한 즐거움과 영원한 행복으로 채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는 영원한 패망을,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승리, 곧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Ⅲ.약속의 성취로 오셨습니다.
본문 6~7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참 빛으로,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는 아이러니하게도 힘도 없고, 연약한 존재의 표상인 아기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기는 분명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확실하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자서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토록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지만, 그분의 실존은 결코 연약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본문 6절에서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정사(政事)’는 ‘통치(統治)’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깨로 정사를 메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위임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지만 그분은 온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 성경은 그 아기의 이름을 5가지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이사야가 이 아기의 이름을 4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은 호칭이 아닌 그분의 본질과 속성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본질과 속성을 그 이름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했습니다.
첫째, “기묘자라, 모사라”라고 했는데, 이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즉 “모사의 기묘자”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뜻은 ‘인간의 지혜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구속 사역을 감당하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메시야는 “모사”이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이 직면한 모든 삶의 문제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은 메시야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야지만 그분은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메시야는 자신이 전능하신 자이시기에 인류 구원을 위한 그 모든 계획을 완성하심에 있어서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영원한 아버지이심을 의미합니다. 즉 이 아버지는 혈통을 따르는 아버지가 아니라, 창조하신 분이요, 조성하신 분이요, 구속하신 분이요,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는 부성적 사람으로 영원토록 자기 백성을 양육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넷째, “평강의 왕”은 성부 하나님의 위임을 받고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왕으로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의 통치는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그 메시야는 자기 백성들이 다시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완전한 충족의 상태, 완전한 평화의 상태를 누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 메시야가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성취됩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위(位)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삼하7:13f). 그런데 본문 7절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분명 장차 오시는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시며, 다윗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에서의 다윗 왕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경하는 하나님 왕국의 실체임과 동시에 장차 오셔서 건설하실 메시야 왕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차 오실 그 메시야는 다윗의 위에 앉아서 영원토록 그 나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또한 그 메시야의 왕국은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로 통치되는 왕국입니다. 이 “정의와 공의”는 메시야 왕국과 이 지상의 왕국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표지(標識)입니다. 또한 이 “정의와 공의”는 오직 인간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열심” 즉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불변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당신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로 하나님의 이 약속을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옛날 에덴에서 아담에게 하셨던 약속대로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복의 근원으로 오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약속대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대로 영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대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대로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 오셨습니다(미5:2).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대로 공의로운 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말4:2).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당신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시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는, 어둠으로 덮인 이 세상에 참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찬양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분 앞에 꿇어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 크고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 소식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원하기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아기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