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2115-17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성도 여러분! 본문은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본문의 내용은 앞의 1-14절에 나타난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밤새도록 고생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해 주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침 식사를 통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탁 공동체를 이루는 사랑으로 엮어진 관계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사실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잔인한 질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많고 많은 질문 가운데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이 질문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베드로의 사정을 알지 못하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베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 질문을 함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계실까요?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서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마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31).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있게 말하기를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26:33).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34). 이 때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26:35).

 

 

하지만 베드로의 이 장담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만찬을 마친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당신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마쳤을 때, 유대인들이 보낸 무리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 잡히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다 도망했습니다, 물론 그 제자들 중에는 베드로도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잡혀가신 예수님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집까지 멀찍이서 뒤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바깥뜰에서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22:54~62).

 

 

이후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사흘 때 되는 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들,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시고 있습니다.

 

 

이 만남에서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베드로에게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이 조금씩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입니다. 동일한 질문에 대한 동일한 대답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질문과 대답이 베드로의 사명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질문과 대답과 사명은 바로 오늘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우리의 사명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님의 질문

 

 

본문 15, 16, 17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 이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시몬아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시몬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고,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수님이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따라서 시몬이 본명이고, 베드로는 별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그의 이름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당시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1:42).

 

 

하지만 이 호칭은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을 부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정감을 담아서 부르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를 향하여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그 이름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한 사랑으로 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호칭 속에서는 이처럼 변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는 다음의 세 가지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즉 비교의 대상인 이 사람들이 누구와 연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은 과거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장담했던 내용을 떠 올리게 합니다. 즉 마태복음 2633절에서는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었고, 요한복음 1337절에서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라고 장담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의 길에 대해서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마태복음 1037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이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 있어서 무엇이 더 우선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자신과 함께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여기에 있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비교의 대상이 사람이 아닌 베드로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즉 베드로의 집이나 고기를 잡는데 필요한 배와 그물과 같은 것들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베드로가 삶을 영위하고 가정을 꾸려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베드로의 인생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것보다 제자로서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6:33).

 

 

성도 여러분! 물론 예수님의 질문은 첫 번째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두 가지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 사랑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다시금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듣고 싶은 고백이 있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 우리의 대답

 

 

본문 15, 16, 17절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한결같이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베드로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 앞에서 그토록 큰소리를 쳤는데,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비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했건만 자신의 말에 대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는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이 자신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 알아도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이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면서도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 대답해야 하는 자신이 얼마나 뻔뻔하게 느껴질 것인지를 다 알면서도 대답은 해야만 합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는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호언장담할지라도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지라도 또 자신이 주님을 부인하고 마는 자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하나 자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러한 연약함 때문에 통곡했었습니다.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통곡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는 자신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표현은 원문대로 직역하면 당신이 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의 당신이라는 표현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면 스승에 대한 합당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에서는 이 단어가 아주 친밀한 사이에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κύριος)”라는 단어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강조하는 공식적인 호칭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당신(σύ)”은 이러한 관계를 떠나 아주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 안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σύ)”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에도 이를 사용한 것은 베드로의 대답에서 베드로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강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이 더 분명하게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기에는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잘 말고 있기에 그렇게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예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무엇이라 고백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예수님 앞에서 자신있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모르시기 때문에 이 고백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 안에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그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는 사랑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5, 16, 17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사명은 여러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419절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어부의 삶을 사는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사명이 복음을 전파하여 죄와 사망에 있는 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임을 가리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18절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장차 복음을 전파함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양육해야 는 사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사명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의 사명이 단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 안의 성도들이 성도답게 성숙해질 수 있도록 저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관리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은 이미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말씀하셨던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복음 2232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말씀하신 후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에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아름답게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의 사명과 관련해서 본문에서 나타나는 아주 근본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그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에게 물으신 것은 단 하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느냐 하는 것만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사명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오직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오직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에게 많은 재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명을 받은 자는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만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예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시간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 예수님, 나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예수님, 나를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신 예수님, 그 예수님 앞에 이 사랑을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한 성도입니다. 그리고 사명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함으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증명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아주 작은 사명일지라도 주님 앞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주님께서는 이 시간도 저와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분명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 고백을 기뻐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와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원하기를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들이 주님 앞에 진실한 사랑의 고백과 헌신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