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표징

 

 

 

빌립보서 44-5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가 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유머처럼 사용했던 말 가운데 하나가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질문은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다운가?” 하는 질문 앞에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조금 알고, 예배에 참석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정말 그리스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고, 성령님을 말한다고 해서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요소가 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것도 없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참모습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을 받는 정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까지도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나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표징(標徵)”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합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을 드러내 보이는 뚜렷한 점이라고 하며, 징표(徵標)”라는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표징이라는 단어를 나에게 적용한다면, 이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오직 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이 표징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다른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게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이 나를 통해서 예수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표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본문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빌립보서에는 이 기뻐하라고 하는 권면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218절에서도, 그리고 31절에서도 권면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바울은 또다시 같은 말로 권면합니다. 그만큼 성도들 안에서 이 기쁨은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기쁨이 없다면 이는 무엇인가가 부족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에게서 기쁨이 없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진정 예수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임을 믿는다면 기쁨이 넘치는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의 기쁨이 가지는 분명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언제나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여건을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하는 과정에 기뻐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기쁨은 이러한 기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쁨은 우리가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누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믿음이 관련되어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구원이 관련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과 관련된 기쁨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ν κυρί) 기뻐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쁨은 주님께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의 구원을 왕성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그 주님과 그 날에 누릴 영광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기쁨의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평탄한 길을 걸어갈 때도 기뻐하기 쉽지 않은데, 우리 앞에 닥치는 많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경을 극복하는 기쁨은 오직 우리 주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며 나의 모든 발걸음에 동참하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가는 길이 어렵고 힘이 들지라도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 말씀하시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을 생각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실패자 같고, 패배자 같이 보일지라도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믿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을 소망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기쁨은 상황을 초월하는 항상의 기쁨입니다.

 

 

여기에서 항상(πάντοτε)”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한 순간도 예외가 없는 모든 시간의 전부를 의미랍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기뻐해야 할 시간은 모든 시간이요, 모든 순간이요, 모든 상황입니다. 즉 성도가 기뻐하지 못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기쁨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저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결국 성도가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절 이하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이 권면은 말로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쁨의 삶을 모범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지만, 오히려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16:25). 바울은 어떤 자들이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목적을 가지고 순전치 못한 의도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뻐했습니다(1:17-18). 바울은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기쁨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자신있게 권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기뻐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그분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자라면 우리는 모든 시간과 모든 상황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장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성전에 대적들에게 짓밟히고, 예루살렘이 황폐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하박국 선지자는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3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쁨은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자이시다라는 단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어느 정도의 기쁨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쁨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나에게는 정말 예수를 믿는 기쁨이 있습니까? 나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까? 나는 지금 비록 힘이 들고 어렵지만 나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장차 들어갈 천국과 영원히 누릴 그 생명을 인해서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얼굴에 기쁨의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하고 있는 내 얼굴에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입술로는 찬양한다고 하는데, 얼굴에는 기쁨의 모습이 없다면 그 찬양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다면 그 봉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시간과 모든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의 모습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표징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관용을 베푸는 자가 되라.

 

 

본문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관용(寬容;πιεικής)”은 문자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우위성을 내세우지 않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드러움, 인내, 타당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고, 시편 855절에서는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넓은 마음으로 남을 품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기본적인 아량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관용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지금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과거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이 죄는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그 죄의 대가는 오직 사망입니다(2:17, 6:23).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품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더러워졌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일을 행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그분이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죄가 대속되었습니다. 즉 죄의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죄의 문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얽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부터도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죄의 문제를 간과하십니다. 그의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넓은 가슴이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고 우리를 다만 그 사랑으로 품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관용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그 관용을 나타내라고 권면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관용을 나타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죄악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모든 죄악에 대해서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속히 오실 우리 주님께서 다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고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해야 하는 전부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서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이 말로는 쉬운 것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용서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기본은 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고, 용서했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꾸만 들추어냅니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고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43:25).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용서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할 내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큰 용서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2절에서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6:14-15). 물론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형제들을 대하여 관용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용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은 자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라는 사실로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만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이 사실만 기억한다면 우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웃을 넓은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비록 저들이 나에게 잘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용서하고 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기억하면서 나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든 시간과 모든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움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게 되고, 우리를 통해서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통해서 저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광성의 성도들이 항상 기뻐하는 삶과 관용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징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속히 오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