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1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05)
본문 : 벧후 1:5-7
제목 : 더욱 힘써 공급할 것들 2.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전서는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알게 하여 어떠한 경우든지 이 믿음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승리할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교회 내에 침투하는 거짓선생 이단의 세력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사실 외부로부터 박해를 가하는 세력은 오히려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단합을 하게하고, 더 힘을 키우게 하여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지만 내부의 적은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쉽게 넘어 가는 더 위험한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교회의 내부에 침투한 거짓선생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면서 먼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 약속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너무나 보배롭고 너무나 위대한 능력을 가진 것이지만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것이라고 그냥 모셔놓으면 안 되고 그 믿음을 우리 삶 속에 활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돈과 같은 것들은 사용하면 없어지지만 믿음은 그와 달라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커지고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소중하고 귀한 엄청난 능력을 가진 믿음을 은혜로 선물로 받았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았으면서 믿지 못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손을 만져보든지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우리도 이 귀한 믿음을 받았으면 어떻게 하든지 이 믿음을 삶에 실천해서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가 믿음이 없는 것은 믿음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 믿을 삶속에서 실천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따라 살아보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소중함을 말씀하고 나서 그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진 우리가 그 믿음에 힘써 공급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믿음에 우리가 힘써 노력하고 함께 공급해야 될 것을 본문을 통해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에다가 우리가 더해야 할 것들 즉 힘써 공급해야 할 덕목 일곱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설교에 앞의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1)믿음에 덕을
믿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믿음에 가장 먼저 더해야 하는 것은 덕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려면 먼저 마음이 바르고 선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에 이런 덕스러움이 더해질 때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 되고 성장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2)덕에 지식을 더하라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는 지식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양심대로 바르게 산다, 나는 좋은 일을 하면서 산다. 라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서 그 말에 맞지 않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양심대로 산다고 하지만 그 양심이 옳은 양심이 못되고 나는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일이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지식 즉 지혜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지식에 절제를 더하라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식에 절제를 더하는 것입니다.
4)절제에 인내를 더하라
절제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지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면 내가 아는 지식으로 좀 바르게 붙잡아 주어야 되는데 그것을 참기가 힘이 듭니다.
참는 데는 인내심이 무척이나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특별히 이런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그 소망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의 차이가 많아서 실망을 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심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다음에 오는 세 가지의 덕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믿음을 삶속에 실천하시어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5.인내에 경건을
우리의 모든 삶에 인내처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화가 날 때도 참는 것이 좋고, 나쁜 말을 하고 싶을 때도 참는 것이 좋습니다.
욕심도 참고, 노는 것도 좀 참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과소비 하고 싶은 것도 참으면 좋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경건한 삶을 위해서 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참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참는가? 라고 할 때 경건을 위한 참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대로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이렇게 교회에 와서 함께 드리는 예배만 예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사는 삶이 예배를 위한 삶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여기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경건한 삶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경건한 삶을 사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그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의 경건한 삶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의 경건을 통해 경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온 집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경외란 말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막강한 로마군대의 백부장 쯤 되면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용감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군대의 대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제멋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길 줄만 알면 바른 사람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경외란 하나님의 형벌과 저주를 무서워하는 차원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 경외는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하는 경외였습니다.
이는 고넬료의 경건함이 진실한 경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경건이 가식적이고 사람들 눈에 보이게 하려는 경건이었으면 가족들이 거기 동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함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온 가족들이 그를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전투하는 군인이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에서 정복을 당한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불쌍한 것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말로만 경외하는 삶이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을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항상'이란 말은 "계속해서'라는 뜻과 '모든 경우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인내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꼭 모든 일에 참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을 위해서는 참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처럼 늘 하나님을 경외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일을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또 구제와 같이 선한 일에 더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선한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일에도 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늘 어떤 경우에나 어떤 시간에나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경건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6.경건에 형제 우애를
경건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즉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는 고넬료의 경우와 마차가지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도 포함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는 경건에는 형제우애를 더해야 그것이 참된 경건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27절에 참된 경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고아나 과부처럼 소외된 자들이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경건하다고 자칭 자랑하는 사람들이 전혀 그들의 어려움을 돕지 않는 것을 보고 그런 경건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아나 과부는 어려운 사람 연약한 사람,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그 어려움을 돌아봐 주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해야 그것이 참된 경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주여, 주여 하는데 밖에 나가면 어려운 사람에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요란하게 자랑은 하는데 어려운 이웃에게 손 한번 내밀지 못하고 자기만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옛날에 나온 책이지만 “한국 크리스천의 현주소”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저자기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하숙집 주인은 정말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여자 집사님이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도 잘 하는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하루는 거지가 찾아와서 밥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착할 것 같은 교회의 집사님이 성질을 내면서 거지를 쫓아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저자가 생각하기를 아 이아주머니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구나. 라고 느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 앞길도 제대로 못 닦는 사람이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다 도와주면서 살겠습니까?
우리 동네에도 참 불쌍한 노숙자 한 사람이 오랫동안 동네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새벽에 지나가다 보면 추운데 아무데서나 잠을 자고 있는 그 사람을 봅니다.
지나가면서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떻게 동네에 교회도 많고 목사도 많고 부자도 많을 텐데 저 한 사람을 어떻게 살게 해주지 못할까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주변의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다 돌봐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구제를 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집사의 임무는 구제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와주기 위해서 세운 직분이 집사 직입니다.
교회에 있는 우리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돌봐 주는 마음이 있을 때 그 경건이 참된 경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주님 안에서 육신의 형제보다 더 친밀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알고 정말로 친밀하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7.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경건한 삶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섬기는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경건한 삶에는 형제우애와 같은 성도끼리 나누는 정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형제우애에서 사랑은 필라델피아(φιλαδελφία) 사랑입니다.
형제간의 사랑, 사람들이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형제 우애에 더해야 하는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신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차원 높은 사랑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나누는 사랑은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나누는 그런 우정과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희생적인 사랑이 더해질 때 참된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조건을 갖추었을 때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얼굴이 예쁘든지 돈이 많든지 마음이라도 착하든지 어떤 내가 좋아하는 조건을 갖추었을 때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무조건입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똑똑하거나 미련하거나 그냥 나를 사랑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나 자신을 위해서 사랑합니다.
나 자신이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랑을 합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이익을 위한 계산적인 사랑입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을 때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드리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수시로 변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조금만 조건이 바뀌어도 변하고 주금만 불이익을 당해도 변해버리고 마는 사랑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짧고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조간이 바뀌어도 이익이 없어도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할 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의 믿음이 정말로 빛나는 믿음 값진 믿음 진실 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에 참된 사랑을 더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을 힘껏 공급하면서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후 1:5-7
제목 : 더욱 힘써 공급할 것들 2.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전서는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알게 하여 어떠한 경우든지 이 믿음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승리할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교회 내에 침투하는 거짓선생 이단의 세력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사실 외부로부터 박해를 가하는 세력은 오히려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단합을 하게하고, 더 힘을 키우게 하여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지만 내부의 적은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쉽게 넘어 가는 더 위험한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교회의 내부에 침투한 거짓선생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면서 먼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 약속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너무나 보배롭고 너무나 위대한 능력을 가진 것이지만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것이라고 그냥 모셔놓으면 안 되고 그 믿음을 우리 삶 속에 활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돈과 같은 것들은 사용하면 없어지지만 믿음은 그와 달라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커지고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소중하고 귀한 엄청난 능력을 가진 믿음을 은혜로 선물로 받았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았으면서 믿지 못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손을 만져보든지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우리도 이 귀한 믿음을 받았으면 어떻게 하든지 이 믿음을 삶에 실천해서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가 믿음이 없는 것은 믿음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 믿을 삶속에서 실천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따라 살아보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소중함을 말씀하고 나서 그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진 우리가 그 믿음에 힘써 공급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믿음에 우리가 힘써 노력하고 함께 공급해야 될 것을 본문을 통해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에다가 우리가 더해야 할 것들 즉 힘써 공급해야 할 덕목 일곱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설교에 앞의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1)믿음에 덕을
믿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믿음에 가장 먼저 더해야 하는 것은 덕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려면 먼저 마음이 바르고 선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에 이런 덕스러움이 더해질 때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 되고 성장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2)덕에 지식을 더하라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는 지식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양심대로 바르게 산다, 나는 좋은 일을 하면서 산다. 라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서 그 말에 맞지 않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양심대로 산다고 하지만 그 양심이 옳은 양심이 못되고 나는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일이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지식 즉 지혜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지식에 절제를 더하라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식에 절제를 더하는 것입니다.
4)절제에 인내를 더하라
절제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지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면 내가 아는 지식으로 좀 바르게 붙잡아 주어야 되는데 그것을 참기가 힘이 듭니다.
참는 데는 인내심이 무척이나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특별히 이런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그 소망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의 차이가 많아서 실망을 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심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다음에 오는 세 가지의 덕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믿음을 삶속에 실천하시어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5.인내에 경건을
우리의 모든 삶에 인내처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화가 날 때도 참는 것이 좋고, 나쁜 말을 하고 싶을 때도 참는 것이 좋습니다.
욕심도 참고, 노는 것도 좀 참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과소비 하고 싶은 것도 참으면 좋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경건한 삶을 위해서 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참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참는가? 라고 할 때 경건을 위한 참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대로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이렇게 교회에 와서 함께 드리는 예배만 예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사는 삶이 예배를 위한 삶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여기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경건한 삶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경건한 삶을 사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그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의 경건한 삶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의 경건을 통해 경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온 집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경외란 말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막강한 로마군대의 백부장 쯤 되면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용감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군대의 대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제멋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길 줄만 알면 바른 사람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경외란 하나님의 형벌과 저주를 무서워하는 차원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 경외는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하는 경외였습니다.
이는 고넬료의 경건함이 진실한 경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경건이 가식적이고 사람들 눈에 보이게 하려는 경건이었으면 가족들이 거기 동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함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온 가족들이 그를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전투하는 군인이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에서 정복을 당한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불쌍한 것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말로만 경외하는 삶이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을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항상'이란 말은 "계속해서'라는 뜻과 '모든 경우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인내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꼭 모든 일에 참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을 위해서는 참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처럼 늘 하나님을 경외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일을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또 구제와 같이 선한 일에 더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선한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일에도 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늘 어떤 경우에나 어떤 시간에나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경건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6.경건에 형제 우애를
경건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즉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는 고넬료의 경우와 마차가지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도 포함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는 경건에는 형제우애를 더해야 그것이 참된 경건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27절에 참된 경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고아나 과부처럼 소외된 자들이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경건하다고 자칭 자랑하는 사람들이 전혀 그들의 어려움을 돕지 않는 것을 보고 그런 경건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아나 과부는 어려운 사람 연약한 사람,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그 어려움을 돌아봐 주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해야 그것이 참된 경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주여, 주여 하는데 밖에 나가면 어려운 사람에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요란하게 자랑은 하는데 어려운 이웃에게 손 한번 내밀지 못하고 자기만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옛날에 나온 책이지만 “한국 크리스천의 현주소”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저자기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하숙집 주인은 정말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여자 집사님이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도 잘 하는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하루는 거지가 찾아와서 밥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착할 것 같은 교회의 집사님이 성질을 내면서 거지를 쫓아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저자가 생각하기를 아 이아주머니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구나. 라고 느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 앞길도 제대로 못 닦는 사람이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다 도와주면서 살겠습니까?
우리 동네에도 참 불쌍한 노숙자 한 사람이 오랫동안 동네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새벽에 지나가다 보면 추운데 아무데서나 잠을 자고 있는 그 사람을 봅니다.
지나가면서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떻게 동네에 교회도 많고 목사도 많고 부자도 많을 텐데 저 한 사람을 어떻게 살게 해주지 못할까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주변의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다 돌봐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구제를 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집사의 임무는 구제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와주기 위해서 세운 직분이 집사 직입니다.
교회에 있는 우리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돌봐 주는 마음이 있을 때 그 경건이 참된 경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주님 안에서 육신의 형제보다 더 친밀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알고 정말로 친밀하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7.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경건한 삶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섬기는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경건한 삶에는 형제우애와 같은 성도끼리 나누는 정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형제우애에서 사랑은 필라델피아(φιλαδελφία) 사랑입니다.
형제간의 사랑, 사람들이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형제 우애에 더해야 하는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신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차원 높은 사랑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나누는 사랑은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나누는 그런 우정과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희생적인 사랑이 더해질 때 참된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조건을 갖추었을 때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얼굴이 예쁘든지 돈이 많든지 마음이라도 착하든지 어떤 내가 좋아하는 조건을 갖추었을 때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무조건입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똑똑하거나 미련하거나 그냥 나를 사랑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나 자신을 위해서 사랑합니다.
나 자신이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랑을 합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이익을 위한 계산적인 사랑입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을 때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드리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수시로 변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조금만 조건이 바뀌어도 변하고 주금만 불이익을 당해도 변해버리고 마는 사랑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짧고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조간이 바뀌어도 이익이 없어도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할 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의 믿음이 정말로 빛나는 믿음 값진 믿음 진실 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에 참된 사랑을 더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을 힘껏 공급하면서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