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장 45-46절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24시간은 참으로 급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잡히시던 날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요13(1-11), 성만찬을 제정하셨으며(마26:17-30), 제사장으로서의 기도하셨습니다(요17:1-26).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병정들이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마26:47).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습니다.
유대의 병정들에게 붙잡히신 예수님은 밤새도록 4번의 재판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대제사장 가야바 앞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인하여 사형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마26:61-66). 하지만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유대인의 법에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이 없었기 저들은 예수님을 당시의 총독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고, 또한 예수님의 고향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어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냈습니다(눅23:1-6). 하지만 헤롯도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를 찾을 수가 없었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눅23:7-11). 다시금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한 자리에 앉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일 죄가 없음을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을 방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위협은 빌라도를 흔들었고 그는 끝내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말았습니다(눅23:24-25).
예수님께서는 군병들에 의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 씌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많은 피를 흘리셨고 마땅히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마저도 지고가실 힘이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병정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붙들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갔습니다(마26:32-33).
제 삼시 곧 오전 9시 경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 6시간 정도를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양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고 하늘과 땅의 중간에 달리셔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각자가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네 명의 기자들이 남긴 말씀들을 정리해서 이를 시간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①“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②“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③“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요19: 26-27) ④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⑤“내가 목마르다”(요19:28) ⑥“다 이루었다”(요19:30) ⑦“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께서 남기신 이 일곱 마디의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대제사장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종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진정한 인간이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그대로 받으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시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말씀 가운데 네 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신 상황에서 낮 12시부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오후 3시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아람어인데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는 뜻입니다(46절). 이 말씀 속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씀이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간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온갖 고난을 당하심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하는 고난이었고, 주님의 죽으심은 바로 우리가 주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고난이 가지는 의미를 묵상하면서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는 제목으로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Ⅰ.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죄가 심각한 것이요,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罪)는 과연 무엇입니까? 죄의 어원적(語源的)인 의미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표준을 벗어나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표준을 빗나는 것과 미달하는 것, 그리고 지나치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바로 최초의 인류인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부터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고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표준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이를 거역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세상에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세상은 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이 죄는 아주 무서운 전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는 또 다른 죄를 양산해 내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이후에 등장하는 내용을 보면 인간이 죄로 인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하와를 보며 감탄과 사랑의 찬가를 불렀던 사람입니다(창2:23). 그런데 그는 똑같은 여인을 두고 자신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 원흉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창3:12). 또한 하와는 자신의 죄를 뱀에게 뒤집어씌우는 행동을 보입니다(창3:13). 아담과 하와의 이 죄는 당대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인 가인은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창4:8). 그 이후로 인류의 번성과 함께 죄악은 더 관영해 갔고 끝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 말았습니다(창6:5, 7:21).
이처럼 인간의 죄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살아갈 아담에게 경고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창2:17).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분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죄를 범할 경우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죽음은 다음의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함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맙니다. 이는 아담이 죄를 점한 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육신적인 죽음입니다. 이는 인간의 두 구성요소인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또한 호흡이 끊어지는 생물학적인 죽음입니다. 이로 인하여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고, 육신은 흙으로 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심판으로 인해서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것으로 성경은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계20:11-15).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모든 죄인은 이 사망의 형벌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사망의 형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죄인들 가운데서 얼마를 선택하시고 저들을 그 죄로부터 구원해 내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를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는 그 백성들의 죄를 그냥 놔둔 채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그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들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이상 그분은 사망이라고 하는 형벌을 담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는 결코 타협하시거나 양보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당신의 아들일지라도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내 외면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때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시는 그 시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버리셔야 할 만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Ⅱ.예수님의 고통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외로움일 것입니다. 이 넓고 광활한 세상에서 오직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와 함께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 나를 이해하고 나의 형편에 동참하며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사람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을 끝내고자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의 방법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자주 발생하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은 바로 이러한 모습의 연장에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죽음을 생각하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죽음으로 그 고통을 끝내려고 했겠습니까? 물론 그 자살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그 자살이라고 하는 것을 택하게 되는 것은 이 외로움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정말 외롭고 고통스러운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무도 함께 하는 이가 없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무서운 형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데 아버지 하나님도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의 모든 제자들을 포함한 백성들도 그를 버렸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음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그 순간에 하늘과 땅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이 예수님께는 더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자기 백성들의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성부 하나님과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한 생애 동안 성부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습니다(요8:29). 그분의 말씀은 혼자의 말씀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요12:49). 그분의 행하심은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요10:38). 그분은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실 때에, 몇 시간 후면 당신을 버리고 도망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16:32).
이토록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늘 말씀하셨던 예수님, 이토록 함께 하실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이셨던 예수님께서 지금은 그 극도의 외로움을 겪으시면서 고통의 소리를 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고통을 받으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들에게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모습은 너무나도 외롭습니다. 그분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너무나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고통은 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서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는 분명 자기 백성들, 곧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입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이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죄는 생각지 않고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고난임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고난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사53:4-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이 죄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 죄의 결과로부터도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인이 되셨습니다. 자신의 죄가 아닌 자기 백성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양처럼 각기 제 길로 갔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담당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사53:6).
가장 깨끗하고, 가장 순결하고, 가장 거룩하신 그분이 죄로 인해 가장 더러워진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당하는 고통은 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외치는 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소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 것이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Ⅲ.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보다 억울한 죽음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죽음보다 부당하게 여길 죽음이 또한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을까요? 당신의 거룩하신 독생자로 하여금 이토록 부당한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고 계시는 하나님께는 과연 어떤 뜻과 목적이 있었을까요?
물론 십자가는 심판의 현장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심판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증명해 주시는 현장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당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은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자기 백성만을 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요셉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천사의 소식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1:21).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백성들은 그 사랑을 받기에 너무나도 더러웠습니다. 저들은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는커녕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영원한 멸망에 던져지기에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신가를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여기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사랑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입으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친히 움직이시고,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이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원죄로 인해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모든 인간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 관한한 아무런 소망을 찾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죄인의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죄인을 향하여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롬6:23). 따라서 이 법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시라고 할지라도 피해가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신께서 사랑하신 그 죄인들의 죄도 이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저들의 죄는 반드시 담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그 죄의 값을 담당하도록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로 하여금 태초부터 선택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지불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분명하게 증명해 주시는 증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결과로 당하는 고통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로 당하는 형벌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바로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 백성들의 죄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이요, 또한 그들의 죄로 인해 가중되는 고통을 인해서 외치는 절규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우리의 죄로 인해 감당해야 할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또한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형벌을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는지를 보여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우리는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바로 이 절규 때문에 바로 오늘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고통의 절규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 주님 앞에 이제 우리의 사랑을 드립시다. 이 주님의 십자가를 이제 내가 지고 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