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라

 

빌립보서 225-30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속히 보내려고 하는 이유를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냄으로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보편적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 사람이 빌립보 교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이 사람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이 사람을 빌립보 교회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에바브로디도(παφρόδιτος)”입니다. 이 이름은 성경에서 여기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문자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매력적이다. 사랑스럽다라는 의미로 당시 헬라 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되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본래 유대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 즉 철저한 이방의 세계에서, 이방의 문화에서 출생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만나 개종을 하고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후원하기 위한 헌금을 했고 이를 에바브로디도의 손에 들려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한 그는 바울의 곁에서 바울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그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다시 보내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서신 즉 빌립보서를 그의 손에 들려서 보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그를 기쁨으로 영접할 것을 주문합니다. 또한 교회의 지도자로 헌신한 그를 존귀하게 여겨주라고 권면합니다. 이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 안에 기쁨이 충만하고,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빌립보 교회에도 귀한 일꾼입니다.

본문 25절에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고 싶었지만, 형편상 먼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려고 합니다. 즉 지금 바울은 디모데를 빨리 보내고 싶지만, 디모데는 바울의 재판 결과가 나오면 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디모데를 보내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바울은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에바브로디도와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의 관계를 다섯 가지의 표현을 써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나의 형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사용한 형제(δελφός)”라는 단어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형제는 피를 나눈 혈통적인 형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면서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깊은 애정을 나누고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형제의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진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향하여 나의 형제라고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을 함께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함께 수고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함께 수고하는 자(συνεργός)”는 본래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보통 이를 동역자라고 합니다. 이 동역자는 함께 짊어지고 가는 자, 함께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함께 복음의 멍에를 메고 함께 가는 자들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서 함께하는 자였습니다. 아마도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부터 함께했던 자로 추정이 됩니다.

 

 

셋째는 함께 군사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 군사된 자(συστρατιώτης)”나와 함께 군사가 된 자입니다. 군사적인 용어도 생사를 함께 하는 동료 군인을 가리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마치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戰友)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군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복음의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군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말에는 그가 복음을 인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였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등장하는 세 표현은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즉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성품, 그리고 바울에 대한 충성, 나아가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에 대한 헌신이 아주 뛰어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에바브라디도는 더할 나위 없는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 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넷째는 너희 사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너희(μν)”는 앞에 나온 나의라는 표현과 대조되는 것인데, 이는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 교회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표현입니다. 사자(πόστολος)”보냄을 받은 자사도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의 파송을 받아 로마에 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공적인 사명을 가지고, 빌립보 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을 대신하기 위하여 파견된 공식적인 대표자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바브로디도는 곧 빌립보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사도 바울을 섬기기 위해 로마로 파송을 받은 자였던 것입니다.

 

 

다섯째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돕는 자(λειτουργός)”섬기는 자, 봉사자라는 원래는 모든 종류의 공적인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심지어는 자비로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들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70인 역에서는 이 단어가 제사장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 온 것은 단순히 빌립보 교회의 선물을 바울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 곁에서 그를 도와주는 자로 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에바브로디도의 섬김은 단순하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요, 나아가 성직자의 기능을 감당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보내온 연보를 제물(祭物)”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4:18).

 

 

성도 여러분!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있어서나 빌립보 교회에 있어서는 아주 귀한 일꾼입니다. 그는 바울에게 있어서 결코 뒤로 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꾼입니다. 그는 바울에게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고 충성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마음을 다해서, 자신있게 칭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서신을 그의 손에 들려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에게 있어서도 아주 귀중한 일꾼입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보냄을 받아 바울을 섬기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대표해서 바울을 끝까지 섬겼던 일꾼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의 이 귀한 서신을 자신의 고향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전달하는 일꾼으로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연 교회의 지도자에게나 교회에게나 얼마나 귀중한 일꾼입니까? 나는 교회의 지도자가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일꾼입니까? 교회의 성도들이 존경하고 기뻐하는 일꾼입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 일꾼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보내는 이유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빌립보로 보내려고 하는 이유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세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따로 따로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에바브로디도를 위한 이유입니다.

본문 26절에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에 보내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음을 들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 연보를 해서 에바브로디도의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뒷바라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가면서 그의 마음에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깊어갔습니다. 여기에서 사모한다(πιποθέω)”라는 말은 그리워한다, 동경한다라는 뜻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고향인 빌립보를 떠나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가 향수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에바브로디도의 이 간절한 사모함은 단지 인간적인 감정이 아닌 주 안에서 교회를 향한 마음이 더 간절했던 것입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에바브로디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인데,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그의 애정과 관심이 지극히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 일이 더 겹쳤는데, 그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그리고 왜 병에 걸렸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의 병은 매우 위중했고, 27절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병은 아주 심각한 지경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소식은 빌립보에도 전해졌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걱정과 근심은 더해졌습니다. 또한 자신의 병에 관한 소식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저들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에바브로디도는 더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병든 것보다 자신 때문에 빌립보 교회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겁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의 에바브로디도의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사랑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즉 서로를 향하여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이 이들에게 근심과 걱정을 주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로디도의 병과 그로 인해 바울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걱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자기를 파송한 빌립보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처럼 자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빌립보 교회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와 지도자의 관계,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본문 27절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그의 모든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어떻게 하여 그 병에서 치료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인하여 기적적으로 병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쁜 소식을 에바브로디도 자신이 직접 빌립보 교회에 가서 전하고 확인시킴으로 인해 저들에게 근심을 덜어주고 안심을 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평안은 바로 에바브로디도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한 이유입니다.

본문 27절에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본문 28절에서는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에바브로디도의 도움은 너무나 고맙고 큰 위로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바울에게도 근심 위에 근심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에게 긍휼을 베푸심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큰 근심을 덜어주는 은혜의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빌립보 교회가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은 바울에게 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의 건강이 확인되는 것은 빌립보 교회의 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끼칠 영적인 유익이 크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근심을 덜어버리고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근심거리도 함께 벗어지는 것입니다. 진정 성도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이유입니다.

본문 28절에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사도 바울을 향한 사랑은 정말 지극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자 저들은 곧바로 사도 바울을 위해서 연보를 했습니다. 즉 자기들의 사랑을 거기에 담아서 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재물만 보낸 것이 아니라 에바브로디도까지 보내서 바울을 돕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듦으로 인해 오히려 바울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소식은 빌립보 교회에게는 큰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제 병에서 회복된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냄으로 인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짐을 덜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귀환은 빌립보 교회에 큰 안심과 기쁨을 안겨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과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빌립보 교회의 관계가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서로를 위해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서로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서로에게 보여야 할 마음이 아닙니까? 교회는 지도자를 존중하고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도자는 성도들이 자신을 인해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기쁨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성령 안에서 서로 교통하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라.

본문 29-30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야말로 여러 성도에게 그토록 환영을 받고 영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군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의 로마에서의 사역이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의 정성과 사랑을 바울이 기쁘게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가 단순한 환영 이상의 영접을 해야 함과 동시에 그의 수고를 인정하며 존귀히 여기고 섬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이렇게 영접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그가 목숨을 다해 그리스도의 일에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0절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돌보지 아니했다(παραβολεύομαι)”라는 것은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본래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간호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거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출발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에바브로디도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을 섬기는 일에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빌립보 교회로부터 받은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회로부터 받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자기의 일을 구하기에 바빴습니다(21). 하지만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목숨조차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진정 죽기까지 충성한 일꾼이었습니다.

 

 

둘째는 그가 부족함이 없이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0절에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부족함(στέρημα)”은 바울과 떨어져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생각한 만큼 바울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섬김은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넘치는 섬김이었습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본분을 지켰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에바브로디도의 충성으로 인해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복음의 사명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빌립보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제 교회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 귀환합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빌립보 교회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그를 기쁘게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충성과 헌신, 수고를 존중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귀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자들을 서로가 알아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의 헌신과 충성에 기쁨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가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에바브로디도! 그는 주 안에서 진정 충성스러운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나 빌립보 교회에게나 기쁨을 주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사명을 위해서 목숨조차 아깝게 여기지 않고 충성한 일꾼이었습니다. 이제 그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더 교회답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원하기는 여기에 모인 우리 모든 성도 모두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아름다운 일꾼이 되어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고 기쁨이 되는 우리 교회는 굳게 세워가는 충성된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