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01)
본문 : 벧후 1:1-2
제목 : 보배로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동안 베드로전서를 52주에 걸쳐서 설교를 했고 오늘부터는 베드로후서 강해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을 권면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악독한 네로황제의 통치 말기였습니다.
그는 시인으로 자처하면서 시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도시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보면서 시를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방화죄를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 번 알려주고 그런 박해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 베드로전서입니다.
그 후 3년이 지났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순교를 바로 앞두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가까이 왔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노 사도의 머리에 또 한 가지의 염려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고난과 핍박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내부를 침투해 오는 이단의 세력이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슬며시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성도들이 가진 산 소망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아주 나쁜 이단의 세력들이 있다는 것이 큰 근심거리였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외부로부터 적이 침투할 때는 서로 힘을 합하여 그 적과 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핍박이 강할수록 믿음도 더 강하게 되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내부에 침투해서 거짓말을 하는 이단의 속임수는 대항하지도 못하고 쉽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외부의 적은 눈에 보이지만 내부의 적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외부의 적은 적이 누구인줄 알고 대항을 하지만 내부의 적은 적이 누구인줄도 모르고 자신이 적군에게 넘어갔으면서도 넘어갔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베드로는 죽음을 앞두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서신을 다시 한 번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부로 들어오는 이단들을 조심하라 그들에게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된다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의 박해는 없습니다.
너무 자유로운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내부의 이단침투나 복음의 변질 신앙의 변질은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이단이라고 하다가도 세력이 커지면 이단이라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짧은 베드로후서는 믿음의 큰 주춧돌이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후서의 강해설교를 잘 들으시고 또 여러분들도 말씀을 읽으시면서 깊이 생각을 해 보시고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하여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서신을 시작하는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말을 통하여 서신을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서신을 쓰는 목적이 담긴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을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단에게 속지 말고 그 보배로운 믿음을 잘 지키라고 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는 다 베드로사도와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이 무엇인줄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단의 무리들이 아무리 좋은 것을 유혹을 해도 이 보배로운 믿음을 놓치지 않고 굳게 지키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본문 1절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서신을 쓰는 베드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했고 시몬 베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를 쓸 때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도라는 호칭 앞에 종이라는 호칭과 베드로라는 별명 앞에 시몬이라는 본래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냥 단순히 다른 사람과 구별이 되는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자신의 소개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일정한 사명을 위임받아 파견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 선택을 받아 복음을 전했던 12명의 제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한 바울 외에 몇몇 사람에게만 사용된 특별한 명칭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베드로사도를 예수님께 특별한 사명을 위임 받은 사도로 생각하고 교황은 그 뒤를 이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의 제자 중에 수제자였으며 그가 고백한 신앙고백위에 교회가 세워진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사도라고 말한 것은 그 권위를 가지고 이 서신을 쓴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 권위로 중요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느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는 중요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들을 동원해서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그 핵심적인 내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특별한 말씀을 이렇게 특별히 사용된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면서 기록한 이 말씀들이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종이란 말은 당시의 천대받던 노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아주천한 노예를 종이라고 했습니다.
왜 정말로 귀한 신분인 사도라는 말과 함께 정말로 천하고 천한 종이라는 말을 같이 썼을까요?
그냥 사도라는 말로 권위만 내세우면 될 것을 묻지도 않는 말에 자신을 종이라는 천한 말을 썼을까요?
물론 종이라고 해도 사람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종이라고 해도 그 말에는 권위가 있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종의 의무는 주인이 시키는 일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주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을 받들어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종으로서 할 일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이 서신을 기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이 가끔 자신을 주님의 사자나 종으로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사자라는 말을 쓰고 주님의 일을 받들어서 한다는 의미에서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권위는 많이 내세우지만 종으로서의 할 일은 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가 많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배달해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배달사고가 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빼어먹거나 다른 것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기가 있다는 유명한 목사라고 해도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바르게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을 사도요 종이라고 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많은 이단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전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잘못된 설교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으로 그리스도의 뜻만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자들에게
역시 1절 말씀에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쓰고 있는 이 서신은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쓴다고 했습니다.
네로의 박해를 피해서 당시의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결국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베드로 사도가 가졌던 그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1)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과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믿음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으로 세워주신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과 다르게 새로운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언약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하는 새로운 의의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신다는 피로 세운 세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보배롭다고 하는 것은 이 믿음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 줄 만한 능력이 없는 인간을 위해 의를 힘입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곧 독생자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참으로 보배롭고 귀한 것입니다.
2)보배로운 믿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라고 했습니다.
보석은 가진 사람의 신분이 아닌 보석 자체의 가치에 따라 평가 되므로 누구에게나 보배이듯이 우리의 믿음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그 보배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믿음을 평가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믿음생활을 잘하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지 믿음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누가 가지고 있든지 그 믿음 자체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설령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무리 작은 소자라고 하더라도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이 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애 다 동일하게 귀한 믿음입니다.
3)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은 함께 받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 속에 내가 행하여야 하는 어떤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믿는다, 내 믿음이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믿음은 내가 가진 믿음이 아니고 받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에베소서 2: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보배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받은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선물은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값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보배롭다는 것입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받는 사람이 아무리 받기를 원해도 주려는 사람이 없으면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지정하시고 이 선물을 우리에게 나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지목이 되어서 이 믿음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선물로 받은 보배로운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귀한 보물을 가지게 되면 아무렇게나 두지 않고 아주 소중하게 보관을 합니다.
보물을 분실하거나 누구에게 빼앗기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6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돼지는 보석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밟고 뭉개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믿음의 가치를 모르면 마치 돼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철학이나 이론이 우리를 혼동시킨다고 해도 절대로 이 바른 믿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3.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본문 2절 말씀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보배로운 믿음을 통하여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안으로 밖으로 핍박과 유혹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참된 평강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이 서신의 기록하는 베드로 사도의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밖으로는 네로 황제와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탄의 세력들이 압력을 가해오고 안으로는 이단들이 온갖 이단사설을 늘어놓으며 유혹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더욱 많은 평강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더욱 많이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이 서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고 우리 주 예수님을 더욱 많이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더욱 보배로운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더 깊이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더욱 잘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머리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깨달은 진리를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실천할 때 그 신앙이 참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평강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으로 삼으신 그 믿음이기에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잘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더 많이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본문 : 벧후 1:1-2
제목 : 보배로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동안 베드로전서를 52주에 걸쳐서 설교를 했고 오늘부터는 베드로후서 강해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을 권면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악독한 네로황제의 통치 말기였습니다.
그는 시인으로 자처하면서 시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도시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보면서 시를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방화죄를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 번 알려주고 그런 박해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 베드로전서입니다.
그 후 3년이 지났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순교를 바로 앞두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가까이 왔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노 사도의 머리에 또 한 가지의 염려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고난과 핍박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내부를 침투해 오는 이단의 세력이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슬며시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성도들이 가진 산 소망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아주 나쁜 이단의 세력들이 있다는 것이 큰 근심거리였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외부로부터 적이 침투할 때는 서로 힘을 합하여 그 적과 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핍박이 강할수록 믿음도 더 강하게 되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내부에 침투해서 거짓말을 하는 이단의 속임수는 대항하지도 못하고 쉽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외부의 적은 눈에 보이지만 내부의 적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외부의 적은 적이 누구인줄 알고 대항을 하지만 내부의 적은 적이 누구인줄도 모르고 자신이 적군에게 넘어갔으면서도 넘어갔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베드로는 죽음을 앞두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서신을 다시 한 번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부로 들어오는 이단들을 조심하라 그들에게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된다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의 박해는 없습니다.
너무 자유로운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내부의 이단침투나 복음의 변질 신앙의 변질은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이단이라고 하다가도 세력이 커지면 이단이라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짧은 베드로후서는 믿음의 큰 주춧돌이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후서의 강해설교를 잘 들으시고 또 여러분들도 말씀을 읽으시면서 깊이 생각을 해 보시고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하여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서신을 시작하는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말을 통하여 서신을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서신을 쓰는 목적이 담긴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을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단에게 속지 말고 그 보배로운 믿음을 잘 지키라고 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는 다 베드로사도와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이 무엇인줄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단의 무리들이 아무리 좋은 것을 유혹을 해도 이 보배로운 믿음을 놓치지 않고 굳게 지키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본문 1절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서신을 쓰는 베드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했고 시몬 베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를 쓸 때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도라는 호칭 앞에 종이라는 호칭과 베드로라는 별명 앞에 시몬이라는 본래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냥 단순히 다른 사람과 구별이 되는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자신의 소개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일정한 사명을 위임받아 파견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 선택을 받아 복음을 전했던 12명의 제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한 바울 외에 몇몇 사람에게만 사용된 특별한 명칭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베드로사도를 예수님께 특별한 사명을 위임 받은 사도로 생각하고 교황은 그 뒤를 이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의 제자 중에 수제자였으며 그가 고백한 신앙고백위에 교회가 세워진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사도라고 말한 것은 그 권위를 가지고 이 서신을 쓴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 권위로 중요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느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는 중요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들을 동원해서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그 핵심적인 내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특별한 말씀을 이렇게 특별히 사용된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면서 기록한 이 말씀들이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종이란 말은 당시의 천대받던 노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아주천한 노예를 종이라고 했습니다.
왜 정말로 귀한 신분인 사도라는 말과 함께 정말로 천하고 천한 종이라는 말을 같이 썼을까요?
그냥 사도라는 말로 권위만 내세우면 될 것을 묻지도 않는 말에 자신을 종이라는 천한 말을 썼을까요?
물론 종이라고 해도 사람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종이라고 해도 그 말에는 권위가 있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종의 의무는 주인이 시키는 일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주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을 받들어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종으로서 할 일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이 서신을 기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이 가끔 자신을 주님의 사자나 종으로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사자라는 말을 쓰고 주님의 일을 받들어서 한다는 의미에서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권위는 많이 내세우지만 종으로서의 할 일은 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가 많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배달해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배달사고가 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빼어먹거나 다른 것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기가 있다는 유명한 목사라고 해도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바르게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을 사도요 종이라고 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많은 이단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전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잘못된 설교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으로 그리스도의 뜻만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자들에게
역시 1절 말씀에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쓰고 있는 이 서신은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쓴다고 했습니다.
네로의 박해를 피해서 당시의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결국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베드로 사도가 가졌던 그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1)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과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믿음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으로 세워주신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과 다르게 새로운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언약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하는 새로운 의의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신다는 피로 세운 세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보배롭다고 하는 것은 이 믿음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 줄 만한 능력이 없는 인간을 위해 의를 힘입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곧 독생자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참으로 보배롭고 귀한 것입니다.
2)보배로운 믿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라고 했습니다.
보석은 가진 사람의 신분이 아닌 보석 자체의 가치에 따라 평가 되므로 누구에게나 보배이듯이 우리의 믿음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그 보배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믿음을 평가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믿음생활을 잘하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지 믿음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누가 가지고 있든지 그 믿음 자체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설령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무리 작은 소자라고 하더라도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이 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애 다 동일하게 귀한 믿음입니다.
3)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은 함께 받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 속에 내가 행하여야 하는 어떤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믿는다, 내 믿음이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믿음은 내가 가진 믿음이 아니고 받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에베소서 2: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보배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받은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선물은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값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보배롭다는 것입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받는 사람이 아무리 받기를 원해도 주려는 사람이 없으면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지정하시고 이 선물을 우리에게 나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지목이 되어서 이 믿음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선물로 받은 보배로운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귀한 보물을 가지게 되면 아무렇게나 두지 않고 아주 소중하게 보관을 합니다.
보물을 분실하거나 누구에게 빼앗기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6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돼지는 보석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밟고 뭉개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믿음의 가치를 모르면 마치 돼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철학이나 이론이 우리를 혼동시킨다고 해도 절대로 이 바른 믿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3.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본문 2절 말씀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보배로운 믿음을 통하여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안으로 밖으로 핍박과 유혹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참된 평강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이 서신의 기록하는 베드로 사도의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밖으로는 네로 황제와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탄의 세력들이 압력을 가해오고 안으로는 이단들이 온갖 이단사설을 늘어놓으며 유혹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더욱 많은 평강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더욱 많이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이 서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고 우리 주 예수님을 더욱 많이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더욱 보배로운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더 깊이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더욱 잘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머리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깨달은 진리를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실천할 때 그 신앙이 참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평강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으로 삼으신 그 믿음이기에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잘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더 많이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