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관심은 어디에?

요한복음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즉 여러분의 하루 생활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이나 생각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은 크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가장 먼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거기에 따른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의 사건은 사람의 관점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베다니에서 묵으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살고있는 동네입니다. 특히 이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자로 아주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안식일을 지나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고, 한 주간의 마지막 삶을 사시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급박한 마지막 한 주간을 앞두고 마지막 휴식과 안정을 위해서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자 그곳에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관한 잔치인데 다른 성경에 보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26:6, 14:3). 따라서 이 시몬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잔치가 누구를 위한 잔치이며, 그 잔치 석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잔치는 자기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잔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리아의 도유(塗油) 사건입니다. 즉 마리아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는 사건입니다. 잔치가 계속되어 갈수록 마르다는 잔치 때문에 분주합니다. 그런데 잔치가 무르익어갈 즈음에 마리아가 자기의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관습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헌신의 표시로 향유를 부었겠지만, 예수님은 거기에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장사를 예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이러한 순순함과는 달리 극명하게 대조되는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향유를 허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요한은 그가 본래 돈을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함으로 장차 있을 예수님께 대한 배반과 예수님을 팔게 되는 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몇 사람의 관심과 시선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주관과 관심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은 자는 오직 한 사람 마리아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직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앞일과 관련된 일에 관심을 보였고, 행동으로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마음은 분명 이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내 이익을 먼저 추구하고, 나의 편안함을 먼저 누리려고 하는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내 관심은 어디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이 무엇이며, 내가 고쳐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진정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에 최우선하는 우리의 신앙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일에 분주한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는 일에 분주합니다. 사실 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은 항상 이렇게 분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마르다가 자기의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눈에 동생 마리아의 모습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40).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요청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심으로 오히려 마리아의 선택이 더 좋은 것, 더 옳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1-42).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다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아닙니다. 마르다는 마르다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일보다 마리아의 일이 예수님의 마음에 더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일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이 교회 안에는 마르다와 같은 인물들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마르다의 일을 하지 않고 마리아처럼 하고 있다면 교회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처럼 손을 걷어붙이고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는 마르다의 모습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지금 예수님의 여정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그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자신들의 영화와 관련지어서 생각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20:21).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치적인 메시야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다의 모습을 평가한다면 그는 지극히 육신적인 일에 매달리고 있는 여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즉 마르다의 행동이 잘된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를 제쳐두고서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마르다가 생각하고 분주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 대접하기 위한 음식을 만드는 일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앞길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예수님과 손님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아무리 풍성하게 대접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러한 사람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곁에서 보면 아주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저들은 교회 안에서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까지 나서서 분주하게 일을 합니다. 저들을 인해서 교회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교회의 일들이 무난하게 처리되고 진행되어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진정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고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들의 영은 심히 연약해져 있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데 겉으로 나타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적인 일에는 열매가 나타나지만, 영적인 열매는 아무것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는 일은 많고 나타난 일도 많은데 정작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만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서 평가를 받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3-15) 우리가 남긴 열매들이 육신적인 것들이라면 그것들은 불에 태워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들이 영적인 것들이라면 그 어떤 불에도 태워지지 않고 아름답게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 육신적인 일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그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지만 거기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을 지나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더 중요한 일, 더 근본적인 일에 집중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예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갑자기 마리아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향유는 냄새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앉으신 집 안에는 향유의 냄새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이 향유는 나드는 구약성경 아가서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동방에서 나는 향유를 가리킵니다(1:12). 사실 이 나드 향유는 동방 특히 인도 지방에서 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대 지방에서는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수입상들에 의해서 조달이 되었는데 가격이 아주 비쌌습니다. 또한 아주 적은 양도 가치가 있고 취급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장사꾼들에게는 아주 좋은 물건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양인 한 근은 오늘날의 중량으로 환산한다면 340g 정도 됩니다. 그리고 이의 가치는 300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한다고 해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나드 향유는 당시에도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향유였고, 이 향유를 손님에게 붓는다는 것은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사회에서 향유는 손님의 머리에 한 방울 정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잔치의 절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보통의 관습을 뛰어넘는 아주 파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이렇게까지 하게 된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음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표를 삼고자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 자신의 전폭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대한 최고의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생명을 새롭게 허락하신 예수님께 그 무엇이 아까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셋째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섬김과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즉 보통의 랍비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며, 자신의 전생애를 예수님을 위한 섬김의 생애로 드리겠다고 하는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의미를 예수님께서 직접 부여해 주셨습니다. 본문 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12절에서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마리아가 향유를 부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를 예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녀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아름다운 모습에 그녀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더 깊고 오묘한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이 행동이 더 아름답게 빛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리아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13). 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교회 안의 수많은 사람이 이 마리아와 같은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원하는 것은 크고 원대한 것인데 반해, 정작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일에는 너무나도 소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내가 교회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그 생각을 따라서 움직여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과 충성은 다만 우리의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17:10). 그러면 이후의 일은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하실 일까지 생각하면서 우리의 일을 계획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께 최고의 존경과 최고의 헌신과 최고의 감사와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섬김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주님께 마땅히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주님은 분명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과 충성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그 작은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복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모임에든지 항상 그 분위기에 초를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명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사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결과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하지 않는 자신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 당시의 관습에서조차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파격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잔치석상의 분위기는 아마도 숨소리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적막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쑥덕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잔치석상의 분위기는 마냥 즐거운 모습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다가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리아를 향하여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책망했습니다(5).

 

 

사실 유다의 이 책망은 아주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친히 저들과 함께하셨고, 저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궁중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향하여는 가차없이 질책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생활해 온 유다가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을 책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마리아의 행동을 어찌 이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비단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그 안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마리아의 행동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향유의 가치가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유다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 늘 함께했던 가난한 자들을 끌어들임으로 인해 그 누구도 자신의 이 논리에 대항하지 못하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유다의 말에는 복선(伏線)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그 향유를 사용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는 이 강경한 어조는 단지 마리아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 엄청난 가치를 가진 향유를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붓도록 방치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이러한 가룟 유다의 본심을 아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서 재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유다는 자신의 이 역할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 악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고 하는 큰 돈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만져보지 못한 금액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돈이 자기의 수중에 들어온다면 그 가운데서 얼마는 자신의 몫으로 충분히 챙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계산에 빨랐던 유다는 자신의 이러한 불만을 가난한 자들을 끌어들여서 표출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돈에 눈이 멀어버리고 돈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유다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 유다는 자기의 이해관계는 빨리 계산해 냈지만, 인간됨의 가치나 영적인 가치는 전혀 계산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니 자신의 생각 속에서 고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여인의 고귀한 헌신적인 행위에 대해서 경제적인 낭비라고 평가해 버리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자신의 스승을 은 20, 곧 노예의 값으로 팔아버리는 파렴치한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팔아서라도 나의 유익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는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도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세상의 것들이 자리하게 되면 우리는 목표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우리의 수단으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에 눈이 멀어버린 유다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신의 전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섬긴 마리아의 모습과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유다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서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열심입니까? 아니면 내 개인의 유익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에 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위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나를 통해서 오직 예수만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영광만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현실 가운데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쓰는 말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인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목표와 목적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맞추어 있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만 관심을 두는 자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물질에만 관심을 두는 자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로만 만족하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행복을 누리는 진정한 예수쟁이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원하시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