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남길 것인가
욥기 42장 10-17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왔다가 가면 무엇인가는 반드시 그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따라서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인생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비록 짧게 살지만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더 나은 것, 더 아름다운 것을 남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왔다가 무엇인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이나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이름을 남기고 간 사람도 있는가 하면 가인이나 고라, 그리고 가룟 유다와 같이 죄인의 대표자로서의 이름을 남기고 가는 부끄러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욥입니다.
욥은 우스 땅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불릴 만큼 순전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고 악을 멀리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로 인정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지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증거하시기를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1:8).
그런데 그러한 욥에게 환난이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욥의 신앙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그를 시험하는 자로 나섰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욥의 모든 자녀와 재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욥은 열 명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았던 재산들을 다 잃었습니다. 그 많았던 종들도 다 잃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범죄의 자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욥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1장 21절에 보면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욥의 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다시 한번 욥을 시험했는데, 그것은 바로 욥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욥을 쳐서 머리끝 정수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악창이 발하도록 함으로 욥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너무나도 심해서 욥은 기와로 자기의 몸을 긁어야만 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의 상처로 인하여 변한 흉한 모습은 그의 부인마저도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습니다(2:9). 또한 욥의 친구들이 욥을 문안하러 왔다가 욥의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 칠일 동안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2:13).
하지만 욥은 이러한 시험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욥은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2:10).
이처럼 자신에게 닥쳐온 환난은 지극히 큰 것이었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욥에게는 하나님의 엄청난 복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에 대하여 회복의 은혜와 함께 과거보다 갑절이 되는 물질의 복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욥의 이러한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고, 또한 그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 땅에 또한 남기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욥과 같은 마지막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처럼 아름다운 마지막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잘못에 빠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욥이 본문과 같이 풍성한 재산을 얻게 되는 것이 욥의 공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이 이처럼 아름다운 마지막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결단코 욥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1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욥의 이처럼 풍성한 마지막을 볼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도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지 욥의 공로나 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적은 것 중의 적은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환난을 당한 욥에게 찾아와서 욥이 당하는 그 환난의 원인이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욥의 형편에 대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욥을 정죄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이 변론에 대하여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자신은 친구들이 말하는 그러한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결코 범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한낱 죄인일 뿐입니다. 모두가 다 죄의 값으로 사망에 이르러야 하는 불쌍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을 대신 아들로 하여금 지불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제야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 은혜를 인하여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얻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은혜도 은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 사실을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욥의 죄악을 지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불평하거나 하나님을 상대로 탄식하는 것도 금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특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그리한 것입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무지와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나도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욥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놓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도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사단에게 시험을 허락했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심으로 욥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바로 욥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단련하시고 성숙시키셔서 다음의 역사를 위하여 준비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이러한 단계에 이르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 또 다른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욥이 받은 그 많은 복은 철저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욥의 신앙이 놀랍고 대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욥의 공로나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이러한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모습에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삶에 대하여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우리가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온갖 모든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Ⅱ.처음보다 좋은 것으로 남겨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지막이 처음보다 못하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처음은 빈약하다 할지라도 나중이 창대하고 왕성할 때, 그것을 더욱 아름답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의 욥은 처음에도 창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서 동방의 가장 큰 거부(巨富)였습니다(1:3).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그보다 더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아름답게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모습으로 엎드렸습니다(42:6).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42:9). 욥은 자신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신앙보다 더 성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도 아름다운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처음의 그의 신앙도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그의 신앙은 처음 것을 능가하는 더욱 더 아름답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온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본문 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으로 인해 고통 당하던 자리에서 회복이 된 것입니다. 이전처럼 건강한 몸이 되었습니다. 악창도 사라졌습니다. 기와로 긁어야 했던 가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전에 욥이 병이 들었을 때 다 떠났던 자들이 다시 욥에게 찾아왔습니다. 형제들도 자매들도 또한 그를 알고 지내던 모든 자들이 다시 욥에게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슬퍼하며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예물을 주었습니다. 이는 과거의 아름답던 친척과 이웃의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그의 재물이 회복되었습니다. 그것도 과거보다 갑절로 회복이 된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재산은 욥기 1장 3절과 비교할 때 완전한 갑절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회복시키시되 과거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셨던 것입니다.
다음은 그의 자녀들이 회복되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미 죽은 자녀라 할지라도 저들이 이미 욥의 자녀이기 때문에 욥에게는 갑절의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저 자녀들과 부활의 때에는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욥에게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에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딸들의 아름다움은 욥으로 하여금 잃은 자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딸들의 이름은 저들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첫째인 “여미마”는 사랑과 순결, 그리고 헌신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 “긋시아”는 계피나무의 아름다운 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셋째 “게렌합북”은 여성의 눈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화장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세 딸들의 이름은 제 나름대로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잃은 자녀들을 대신하여 더욱 아름답고 뛰어난 자녀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받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마지막은 이처럼 아름다워야 합니다, 성도는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신앙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제자리걸음을 한다면 결코 그 마지막이 아름답게 장식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가 날마다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비록 어제는 원수이었을지라도 오늘은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활의 실천으로 전해줄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물질적으로 아름다운 마지막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성도가 날마다 가난에 찌들려 산다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 살고 잘 누려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저들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자녀들을 통해서도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아름답게 전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를 이어 신앙이 이어가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을 바로 이어 받아서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디모데의 가정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지막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어떤 것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이웃, 아무리 많은 재물, 아무리 많은 자녀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악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오늘의 사회나 역사가 아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Ⅲ.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누렸지만, 마무리를 잘못함으로 인해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는 경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例)는 솔로몬입니다. 그의 초기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의 지혜, 그의 부귀, 그의 영화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웠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다. 그가 마무리를 잘 짓지 못한 결과는 나라가 분리되는 아픔으로 남게 되었고, 결국은 나라가 멸망을 당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은 비록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의 자녀의 세대에서 그가 잘못했던 결과를 맞이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욥은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재산을 분배함에 있어서 아주 공평하게 했습니다. 본문 15절에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욥은 아들들에게 뿐만 아니라 딸들에게까지 재산을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에서는 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욥은 자기의 딸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상속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녀들에게 균등한 사랑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자녀들이 욥의 사망 후에도 욥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어받아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또한 욥은 장수했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절에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라고 했습니다. 분명 장수는 복(福) 중의 복입니다. 그리고 장수하는 과정에서 자손이 잘 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복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 모든 환난의 시간을 보낸 후에도 140년을 더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나이 175세를 향유했던 것을 볼 때, 욥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당신을 사랑하고 잘 섬기는 자에게 장수의 복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23:25, 26). 그리고 그의 자손 4대를 보았음은 그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잘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욥은 혼자만 장수한 것이 아니라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마음껏 향유했던 것입니다.
또한 욥은 죽음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본문 17절에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한’이란 하나님께서 욥에게 정하신 그의 모든 생애를 가리킵니다. 즉 인간의 출생과 함께 죽음의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신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찼다”라는 것은 ‘만족하다, 완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충분하게 그의 생애를 살았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삶은 후회가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의 마지막에 후회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비록 오래 살았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고생하다가 가는 사람, 사고로 인하여 갑자가 가는 사람,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마지막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욥처럼 장수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한까지 충분하게 누리다가 가는 사람, 참으로 아름다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도는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물론 처음도 중요합니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는가 하는 것은 그 결과를 위해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처음을 잘해도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하면 결코 아름다운 마지막을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가정의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애를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바로 지금부터 우리가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2023년은 어떻게 마무리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올해 동안 무엇을 남겼습니까? 주님 앞에서 의미있는 것을 얼마나 남겼습니까? 혹시 빈손으로 여기에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의 마지막 모습은 어떻게 남을까요? 비록 지금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날이 우리에게 언제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오늘 본문의 욥과 같이 아름다운 마지막을 남기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마지막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처음보다 더 나은 마지막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영원토록 별과 같이 빛나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