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52)
본문 : 벧전 5:12-14
제목 : 하나님의 참된 은혜.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서신을 다 쓰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부분입니다.
이 인사말 속에 여러 가지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신신한 형제 실루아노가 등장합니다.
“실라“라고도 하는 사람인데 사도바울과 2차 전도여행을 같이 갔던 사람이고 바울과 신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찬송으로 그 감옥 문을 열었던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편지를 썼다는 부분도 어떤 사람은 실루아노가 베드로전서를 대필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편지를 수신자에게 전달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누구를 말씀하는 것인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바벨론 교회가 어떤 사람 특별히 어떤 여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이방의 교회 특별히 바벨론이나 아니면 로마의 교회들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 아들 마가라는 사람도 문안을 하고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마가 요한으로 불리는 사람인데 바나바의 조카이고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사람으로 후에 베드로와 함께 전도의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처럼 베드로도 마가를 아들로 부르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이야기들도 잘 살펴보면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보다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인사말 속에 기록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말씀이 이 인사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부분적인 여러 가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조금은 덜 중요한 것들 때문에 반드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을 놓칠 때가 더러 있습니다.
몰라도 되는 것에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보면 꼭 알아야 할 것을 놓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인사말씀의 핵심이면서 또 이 서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1.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오늘 본문 말씀에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것은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한 것 즉 베드로전서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서신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전서나 후서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필립얀시라는 분이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전체의 내용에는 실망을 했습니다만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공히 사용했던 한 표현은 내가 신약에서 제일 좋아하는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두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야 혹은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은혜를 “마지막 최고의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은혜를 교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또는 세상을 향하여 베푸는 사랑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교회를 은혜가 없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랑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않다고들 말을 합니다.
교회가 그런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곳에 더 많은 사랑이 넘치는 것 같고 더 많은 은혜를 베푸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더 썰렁하고 이기심이 넘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은혜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비록 우리 성도들은 그렇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안에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된 은혜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는 그런 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나누어주신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말함에 있어서 보통 생각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라고 생각하는 은혜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건강하고 생활도 여유롭고 평안하고 성공도 하고 그런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참 이상한 것은 구약성경을 더 좋아합니다.
옛날 약속 지나간 약속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아직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옛 약속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세상의 축복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고 살면 받는 복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잘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구약을 좋아하고 구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물론 옛 약속이라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처럼 옛 약속을 배움으로 우리는 새 약속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도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옛 약속도 아직 유효합니다.
다만 그 약속을 스스로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란 그런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세운 새 언약입니다.
구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은혜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그것을 은혜라고 하고 은혜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새로운 언약 즉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세운 세 언약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짧은 베드로 전서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강해설교를 들으면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릴지라도 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전서의 주제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1:3).”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해도 그 나라를 들어가는 방법이 우리의 노력에 있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같이 어리석고 못난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거저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잘남과 못남과 상관이 없이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해 주셨고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이 참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먼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1:2).”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혜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1:5).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1:8-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1:18-19).”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면 하나님은 은혜롭지 못하신 분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왜 고난을 주시느냐고 항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지 못한 분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좀 잘못하고 노력하지 못하면 고생을 하고 망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이렇게 고생을 할 수 있느냐고 항변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그런 세상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을 참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큰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그 받은 은혜 때문에 고난도 당하고 어려움도 당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그 은혜가 더욱 굳건해지고 더욱 확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그 참된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혹시 이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설령 이 육신의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 은혜를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참된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심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입니다.
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 베드로는 그 은혜를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무조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세월만 보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일들을 자세히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1)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1:14-16).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살고는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사람인 것을 알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재물에 욕심을 두고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출세 이 세상의 권력 이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선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3:10-11).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3:1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3:17). 라고 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선한 일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은혜를 받은 자답게 선을 행하면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위에 굳게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가 되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4:9-10).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 내가 가진 달란트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우리 서로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사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 나도 너에게 신세지지 않을 것이니 너도 나에게 뭘 달라고 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철저하게 네 것 내 것을 가려서 내 것은 내가 네 것은 네가 사용하는 것이 바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운영위원을 몇 년 하면서 오늘날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진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육의 현장입니다.
서로 경쟁을 해서 그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 살아남고 내 권리는 내가 찾고 내 것은 누구도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현장입니다.
실력 있는 자, 돈이 있는 자, 능력이 있는 자만 구별이 되어서 그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고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은 기가 죽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세상이 초등학교부터 시작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참 서글펐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어느 개그맨의 외침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 주고 잘난 자나 못난 자가 함께 동등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지낼 수 있는 곳이 교회이고 교회의 성도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그 은혜 가운데 우리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를 받고 바르게 안 성도들은 그 은혜에 굳게 서야 된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전 5:12-14
제목 : 하나님의 참된 은혜.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서신을 다 쓰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부분입니다.
이 인사말 속에 여러 가지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신신한 형제 실루아노가 등장합니다.
“실라“라고도 하는 사람인데 사도바울과 2차 전도여행을 같이 갔던 사람이고 바울과 신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찬송으로 그 감옥 문을 열었던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편지를 썼다는 부분도 어떤 사람은 실루아노가 베드로전서를 대필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편지를 수신자에게 전달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누구를 말씀하는 것인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바벨론 교회가 어떤 사람 특별히 어떤 여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이방의 교회 특별히 바벨론이나 아니면 로마의 교회들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 아들 마가라는 사람도 문안을 하고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마가 요한으로 불리는 사람인데 바나바의 조카이고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사람으로 후에 베드로와 함께 전도의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처럼 베드로도 마가를 아들로 부르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이야기들도 잘 살펴보면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보다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인사말 속에 기록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말씀이 이 인사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부분적인 여러 가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조금은 덜 중요한 것들 때문에 반드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을 놓칠 때가 더러 있습니다.
몰라도 되는 것에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보면 꼭 알아야 할 것을 놓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인사말씀의 핵심이면서 또 이 서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1.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오늘 본문 말씀에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것은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한 것 즉 베드로전서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서신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전서나 후서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필립얀시라는 분이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전체의 내용에는 실망을 했습니다만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공히 사용했던 한 표현은 내가 신약에서 제일 좋아하는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두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야 혹은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은혜를 “마지막 최고의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은혜를 교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또는 세상을 향하여 베푸는 사랑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교회를 은혜가 없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랑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않다고들 말을 합니다.
교회가 그런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곳에 더 많은 사랑이 넘치는 것 같고 더 많은 은혜를 베푸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더 썰렁하고 이기심이 넘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은혜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비록 우리 성도들은 그렇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안에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된 은혜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는 그런 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나누어주신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말함에 있어서 보통 생각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라고 생각하는 은혜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건강하고 생활도 여유롭고 평안하고 성공도 하고 그런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참 이상한 것은 구약성경을 더 좋아합니다.
옛날 약속 지나간 약속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아직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옛 약속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세상의 축복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고 살면 받는 복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잘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구약을 좋아하고 구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물론 옛 약속이라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처럼 옛 약속을 배움으로 우리는 새 약속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도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옛 약속도 아직 유효합니다.
다만 그 약속을 스스로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란 그런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세운 새 언약입니다.
구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은혜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그것을 은혜라고 하고 은혜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새로운 언약 즉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세운 세 언약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짧은 베드로 전서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강해설교를 들으면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릴지라도 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전서의 주제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1:3).”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해도 그 나라를 들어가는 방법이 우리의 노력에 있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같이 어리석고 못난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거저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잘남과 못남과 상관이 없이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해 주셨고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이 참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먼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1:2).”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혜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1:5).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1:8-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1:18-19).”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면 하나님은 은혜롭지 못하신 분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왜 고난을 주시느냐고 항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지 못한 분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좀 잘못하고 노력하지 못하면 고생을 하고 망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이렇게 고생을 할 수 있느냐고 항변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그런 세상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을 참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큰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그 받은 은혜 때문에 고난도 당하고 어려움도 당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그 은혜가 더욱 굳건해지고 더욱 확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그 참된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혹시 이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설령 이 육신의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 은혜를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참된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심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입니다.
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 베드로는 그 은혜를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무조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세월만 보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일들을 자세히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1)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1:14-16).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살고는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사람인 것을 알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재물에 욕심을 두고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출세 이 세상의 권력 이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선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3:10-11).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3:1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3:17). 라고 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선한 일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은혜를 받은 자답게 선을 행하면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위에 굳게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가 되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4:9-10).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 내가 가진 달란트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우리 서로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사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 나도 너에게 신세지지 않을 것이니 너도 나에게 뭘 달라고 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철저하게 네 것 내 것을 가려서 내 것은 내가 네 것은 네가 사용하는 것이 바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운영위원을 몇 년 하면서 오늘날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진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육의 현장입니다.
서로 경쟁을 해서 그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 살아남고 내 권리는 내가 찾고 내 것은 누구도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현장입니다.
실력 있는 자, 돈이 있는 자, 능력이 있는 자만 구별이 되어서 그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고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은 기가 죽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세상이 초등학교부터 시작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참 서글펐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어느 개그맨의 외침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 주고 잘난 자나 못난 자가 함께 동등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지낼 수 있는 곳이 교회이고 교회의 성도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그 은혜 가운데 우리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를 받고 바르게 안 성도들은 그 은혜에 굳게 서야 된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