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빌립보서 1장 29-30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은혜(恩惠;grace)”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 은혜라는 단어는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חֵסֵד”라는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χάρις”라는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인애, 인자, 은총, 은혜 등’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면서도 그 단어가 가진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라고 하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이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 사용되는 이 단어의 의미는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라는 표현은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은혜는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이 은혜는 너무나도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가볍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은혜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기나 한 존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떤 존재가 되기나 합니까?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은혜 앞에서 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 은혜의 크기와 길이와 깊이와 넓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은혜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권리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 하나님은 나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푸셔야만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졌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은 존재에게 은혜를 베푸셨음에 대해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표현에서 아주 특이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보통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할 때,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우리를 위한 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엇인가 유익이 된다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이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풍성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한 열매가 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본문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성도에게 일어난 최대의 기적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아가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식을 넘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해를 넘습니다. 어떨 때는 전혀 이해되지 않음에도 무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이해되십니까? 에덴동산이 이해되십니까? 선악과가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의 홍수 심판과 노아의 방주가 이해되십니까? 아브라함의 사건들이 이해되십니까? 출애굽과 그 여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이해되십니까? 홍해를 건너고는 사건이 이해되십니까? 만나의 사건이 이해되십니까?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 이해되십니까? 가나안 정복 중에 일어난 사건이 이해되십니까? 미래에 있을 메시야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 이해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해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그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이 이해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이해되십니까? 예수님의 승천이 이해되십니까?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이해되십니까?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이해되십니까? 오늘도 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 이해되십니까? 어느 날 어느 때일지는 몰라도 우리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을 앞세우고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이해되십니까? 최후의 심판과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천국이 이해되십니까?
성경에는 이 외에도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지혜로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모든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사람의 말이나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요, 유일한 것이요, 완전한 것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내용이 이해가 되어서 지금 믿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이것을 기적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편에서 보면 그것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진 기적 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즉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이 천지 만물과 나 자신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영원 전에 나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그 십자가 위에서 대속되었음을 믿습니다. 이제 하늘로 가신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를 영접하여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성령께서 내 안에서 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인도자가 되심을 믿습니다. 그 성령께서 나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믿습니다. 또한 그 성령께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믿음과 용기, 그리고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가장 우선되는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적은 일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할 때, 그것이 바로 큰 일이요, 의미가 있는 일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영원한 주(主)이심이 믿어지십니까? 그분이 나의 구원자이심이 믿어지십니까? 그분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됨이 믿어지십니까? 이것이 믿어진다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그 믿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요, 성도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첫걸음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Ⅱ.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본문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을 겪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 때는 없었던 고난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밖에서 살 때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일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부터 그것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이로 인해서 혼란을 겪고, 때로는 믿음의 길어서 떨어져 나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서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지고 떨어져 나가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저들도 자신들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들이 그 일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고난의 크기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컸음을 깨닫고 그로 인해 혼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리고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고난이 없이 살아갈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교정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3절에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난은 단지 우리가 세상 속에서 만나는 고난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육체를 괴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그 고난에서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16절에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과 상급은 우리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은 자신을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성도는 이 고난을 통해서 나의 구속을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성도의 이 고난은 복음을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이요, 그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나아가 성도의 이 고난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가기 위한 고난,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결국 성도는 이 고난 앞에 기뻐하게 됩니다. 성도는 이 고난 앞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임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임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진정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꾼임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위해 얼마나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고난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 기뻐해야 합니다.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에 대한 증거입니다.
Ⅲ.그리스도를 위해 싸우게 하려 하심입니다.
본문 30절에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있다면, 이는 다른 모양으로 볼 때 분명 싸움입니다. 즉 성도는 다가오는 고난을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물론 이 싸움은 육적이고, 육체적인 싸움은 분명 아닙니다. 이 싸움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기에서 “싸움(ἀγών)”은 본래 사도 바울 당시 원형 경기장에서 개최되던 운동경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범위가 확대되어 내외적인 투쟁 모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 자손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지금 옥에 갇혀 있는 것은 싸움의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달려온 모든 걸음이 싸움의 과정이었습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애쓰며 달려온 길이 싸움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바울과 같은 싸움을 싸우고 있다고 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를 바울을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 사랑과 재물로 섬기는 것이 바울의 싸움에 동참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위한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고난과 같은 종류의 고난이나 같은 강도의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같은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싸우는 싸움도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싸우는 싸움도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 복음을 위한 싸움, 교회를 위한 싸움은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싸움은 바울이 먼저 빌립보 교회 앞에서 본을 보였던 싸움입니다. 바울은 자신 앞에 도전해 오는 싸움에 대해서 결코 피하거나 숨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인도하심을 따라 정면으로 대적해서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빌립보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었지만, 바울과 그 일행은 오히려 이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옥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께 감사했고, 하나님께 찬양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매인 것들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간수와 그의 가족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열매까지 얻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지금 옥에 갇혀서 내일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그는 영적인 이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의의 군사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군사들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용사들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한 용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싸우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승리자 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어느 한 상황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자들입니다. 내가 믿는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것도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삶의 여정에서 이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승리를 거두게 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이 은혜 속에서 강하고, 이 은혜와 함께 승리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