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평강
빌립보서 1장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요즘에 편지지에 펜으로 글을 써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이 종이와 펜을 사용하는 편지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보내는 편지는 사랑과 낭만이 가득했었습니다. 아주 급한 일을 전달할 때는 ‘전보(電報)’라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글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긴 글을 써야 한다면 메일을 사용할 것입니다. 짧은 글은 스마트 폰을 통해 DM(Direct Message)이라고 부르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본질적으로 편지입니다. 따라서 빌립보서는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기록되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편지는 보내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보내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이 편지의 권위가 드러납니다. 누가 보냈는지에 따라서 그 편지가 가진 위력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왕이 보낸 편지와 지방의 관리가 보낸 편지의 위력은 다릅니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와 형제가 보낸 편지의 위력은 분명 다릅니다.
또한 편지는 받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받는 대상이 모호하다면 그 편지의 목적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긍정적이라면 서로가 자신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할 수 있고, 부정적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편지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는 상대방에게 이 편지를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책망하는 글로 시작한다거나 추궁을 하는 글로 시작하면 읽는 자들이 그 편지를 끝까지 읽고 그 내용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 갖추고, 정중한 내용으로 시작함으로 인해 편지를 읽는 자들이 마음을 열고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바로 이러한 편지의 형식을 아주 잘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에 편지를 쓰면서 이 편지를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 이 편지를 받고, 읽고, 듣고, 그 내용을 자신과 교회에 적용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기 전에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해 보기를 원합니다.
Ⅰ.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서신의 저자를 가리켜 주는 표현입니다.
사실 바울이 교회들에 보낸 다른 서신들을 보면 인사말과 함께 자신의 사도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절과 골로새서 1장 1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서는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1장 1절에서는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쟁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과연 사도라고 불릴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도행전 1장 16절 이하에서 제자들이 죽은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선택해서 사도의 수가 가입시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사도의 자격으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행1:21-22). 여기에 나타난 사도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가지의 조건에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이 땅에 남아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기에 바빴던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일 뿐이고 다른 사도들과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의 사소권 문제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계속적인 도전과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도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존심과 자부심은 다른 사도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라고 하는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도라고 하는 말을 뺐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회 안에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의심을 품고 있는 성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사도라는 하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을 증명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바울의 관계가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사도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使徒;ἀπόστολς)’라고 하는 단어와 ‘종(從;δουλος)’이라고 하는 단어는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라고 하는 단어는 공적인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특별한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도라고 하는 직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고 위임을 받은 자들로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도라고 하는 직분은 계승이 되지 않는, 즉 사도들의 사후에는 다시는 그 직분을 맡은 자들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종’이라는 단어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이 단어를 보통 사람들은 사용하기를 꺼려했던 단어입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노예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이 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사람들의 가슴에 그리 강하게 다가오지를 않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종이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강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종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가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주인에게 속해서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그 뜻대로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종의 즐거움은 주인의 즐거움 안에서 누려야 하고, 종의 자유는 주인의 통제 안에서만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의 상급은 주인이 베풀어 주시는 한도 내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나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하는 것인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 목적을 위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등.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명한 가치관과 자세를 정립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면,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종”이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쉽게,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웃으실 때 우리도 웃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면 우리도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은 우리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위탁되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기록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Ⅱ.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을 세 종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聖徒;ἅγιος)입니다.
이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분리하다(קדשׁ)’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의 피를 통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로부터의 분리는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 와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특별히 구별된 백성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 단어가 신약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자신의 위치를 바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라고 하는 이름을 가졌다면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요, 죄로부터 구별된 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헌신된 자요,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된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감독(監督;ἐπισκοπης)입니다.
이 말은 본래 ‘내려다 보다’, ‘돌보다’, ‘감독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장로’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이 감독이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관하고 교회를 돌보도록 선택된 사역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적용한다면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모든 사역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를 섬기되, 치리하고 어거(馭車)해 나가고 지도하는 직분입니다. 이들의 최대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요,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요,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며, 때때로 잘못된 길로 가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징책하는 일까지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들에게 믿음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라고 할 것입니다.
셋째는 집사(執事;διακόνοις)입니다.
이 말은 본래 ‘어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교회 안에서 사용되면서 집사는 성도와 교회를 위하여 서로 돕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하는 특별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집사들은 교회의 살림을 맡아서 관리하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자들로 초대교회에서부터 아주 귀하게 헌신되고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이 ‘성도와 감독과 집사’는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와 감독과 집사들에게 편지한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총칭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단순히 빌립보 교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게 동일한 의미로, 동일한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서신을 기록해서 전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교회는 분명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기관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구성하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선택하시고, 구별하시고, 구원하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합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귀하고 천함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고 세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또한 교회는 조직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시기 위해서 교회 안에 ‘직분(職分)’을 두셨습니다. 이 직분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직분은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봉사를 위한 것입니다. 충성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직분이 있어도 그 직분의 최종 목적은 오직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바르게, 아름답게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하니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바울이라고 하는 한 사도를 통해서 빌립보라고 하는 교회에 보낸 편지일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보낸 편지이기도 합니다. 빌립보 교회와 오늘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구성원들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도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Ⅲ.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본문 2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 속에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사랑과 애절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사도 바울의 모든 편지 속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깊은 의미는 단순히 지나가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게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恩惠;χάρις)’입니다.
이는 히브리어를 ‘הסד(헤쎄드)‘, 또는 ’טוב(토브)‘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아무런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값없이 베풀어진 호의, 또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따라서 은혜라고 하는 단어가 사용될 때는 반드시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교회 안에서 사용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가장 먼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었음에 사용됩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요,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죄에서, 그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만을 우리에게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자격도, 공로도,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입혀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도다운 모습을 갖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평강(平康;εἰρήνη)’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שׁלום(샬롬)’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강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사용됩니다. ①소극적인 의미로 전쟁과 투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②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③우리 영혼이 영원히 믿을 만한 반석 위에서 바른길을 걷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④보배로운 것을 온전하게 보증받음으로 인해 누리는 마음의 정서를 말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평강이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 부족한 것이 없으며, 내가 분명하고 바른 의의 길을 가고 있으며 바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되어 있고, 나의 가장 보배로운 것이 그 안에서 온전히 지켜질 수 있다는 충분한 보장이 되어 있을 때 우리가 누리는 마음의 상태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속에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평강은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평강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했습니다.
사실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물론 그 출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바로 그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백성들에게 적용시키십니다. 누리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 은혜와 평강을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임을 믿는 자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을 믿는 자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날마다 함께하심을 믿는 자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성도에게 있어서 이 은혜와 평강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답고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와 평강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친히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신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7).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서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요20:19). 바로 예수님의 이 은혜와 평강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있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이름에 대한 자부심을 얼마나 크게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구원하신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의 구성원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복음을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종이기에,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알 수가 없는 은혜와 평강, 세상이 누릴 수 없는 은혜와 평강을 오늘의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이 은혜와 평강 안에서 진정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