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3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56)
본문 : 막 12:41-44
제목 : 가난한 과부의 헌금.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선뜻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몇 개 있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조상제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대대로 이어오는 제사 문제는 집안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특별히 종갓집 종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제사의 책임자였는데 제사를 안 드리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가문의 원수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술과 담배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술과 담배가 정확하게 성경에서 금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술과 담배는 신앙 생활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교단에서 술과 담배를 금했습니다.
술과 담배에 중독이 된 사람은 그냥 쉽게 끊을 수가 없습니다. 술 담배가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끊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술 담배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아예 술 담배를 허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헌금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다들 어려운 삶을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면서 헌금해야 하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헌금 문제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강제로 징수하는 것도 아니고 형편에 따라 낼 수 있으면 내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경험했던 유교나 불교나 무속종교나 모든 종교가 돈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헌금 문제가 교회에 다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 제사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는 지내지 않습니다. 제사상 차려놓아도 조상귀신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또 교회 내에도 추도예배라는 제사 비슷한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술 담배 문제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옛날 사람들처럼 술에 찌들어서 사는 사람도 없고 교제를 위해서 약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또 건강을 위해서 마시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헌금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돈의 위력이 너무나 막강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돈을 의지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그 좋은 돈을 바치는 것이 어렵습니다.
교회에 잘 다니다가 그만두거나 또 큰 교회로 교회를 옮기는 사람 중에는 돈 문제 때문인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작은 교회는 헌금하는 것이 눈에 보이고 또 교회를 운영하는 일원이 되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헌금에 부담을 가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헌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헌금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시고 헌금에 시험 드는 성도님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 새
본문 41~42절에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성전에 자주 출입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기도 하셨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전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셨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때 성전에 왔던 부자들의 헌금하는 모습과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헌금함에 돈을 많이 넣었고 가난한 과부는 당시 가장 작은 가치의 동전인 렙돈 두 개를 넣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헌금함 맞은 편에 앉으셔서 헌금함을 바라보고 앉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라고 했습니다. 얼마를 헌금하는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헌금하는가를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저 어떤 마음으로 드렸든지 어떤 자세로 드렸든지 그 액수가 많이만 드리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액수보다는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가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부자나 가난한 과부나 어떤 자세로 혹은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부자는 많은 돈을 넣었다고 했고 과부는 아주 작은 가치의 동전 두 개를 넣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어떤 자세로 드렸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드렸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한 모습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드렸을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생활비 전부를 넣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헌금이란 자진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기 위해서 교만하게 드리고 가난한 사람은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걱정하면서 드리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 것을 보셨다는 말씀은 이런 잘못된 헌금에 관하여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전을 운영함에 있어서, 오늘날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재정이 필요하고 이 재정은 헌금으로 충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헌금을 바치는 자세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주시고 이 세상에서 바른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제도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율법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성전을 세워 주셨습니다. 각종 절기나 안식일이나 기념일들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제도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나님께 유익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킴으로 행복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마음은 기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직접적인 유익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은 없습니다.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그 제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 와서 늘 뭘 달라고만 조르고 못된 짓만 하는 것을 보시고 머리만 아프실 뿐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우리가 주일날 이렇게 교회에 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오는 것이며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축복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것들을 우리가 서로 모아서 쓰는 것입니다. 그 헌금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제도를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고 특별히 이런 제도들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고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귀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오는 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금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이지만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오히려 헌금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데 걸림돌이 되게 하고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본문 43~4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헌금의 액수를 보려고 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으로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시기 위해서 헌금함 맞은 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평가는 헌금 액수로 평가를 하고 계십니다. 헌금을 많이 한 부자보다 적게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더 많은 헌금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유대인의 동전으로 로마의 동전인 한 고드란트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한 렙돈은 노동자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돈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백 원짜리 동전 한두 개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통 돈의 액수만 가지고 많고 적음을 평가합니다. 무슨 돈이든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드렸든지 그 액수만 많으면 헌금을 많이 했다고 평가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헌금을 드렸다고 해도 그 액수가 적으면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 기준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헌금을 드리는 사람의 형편이 어떤지에 따라서 드리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서 그 평가 기준을 달리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는 아주 넉넉한 가운데서 많은 돈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쉽게 많이 드린 부자의 헌금보다 어려운 가운데서 드린 적은 헌금이 더 많은 헌금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그 헌금으로 인한 손해가 극심하여서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드린 헌금이기 때문에 크게 평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하실 때 이 장면을 기억하시고 예수님의 평가 기준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돈이 많아서 많이 드리는 사람도 이 장면을 생각하시고 그 부자처럼 교만하게 드리지 마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돈이 없어서 헌금을 바치지 못할 형편에 있는 사람도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형편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적은 액수라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그 형편을 다 아시기 때문에 더 많은 칭찬과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살펴보겠습니다.
1) 헌금제도에 대한 이해(긍정적으로 생각할 것)
구약시대 때도 많은 헌금 종류가 있었습니다. 헌금보다 더 중요하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은 제단에 바칠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은 죽을죄를 대신 지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짐승이 필요했습니다.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죽임을 당하게 한 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헌금을 드리는데 헌금은 죄 사함을 위해서 바치는 제물은 아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전의 유지 관리를 위해서 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서 성전에 출입하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드리는 헌금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면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성전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바치는 성전세를 넣는 헌금함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구제용 헌금함 등이 각각 비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헌금은 죄 사함을 받거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물이 아닙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립니다.
그 헌금을 통하여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교회당 관리 유지비로 쓰고 예배와 설교를 담당하는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지원하며 복음 전도와 선교와 구제사업을 위해서 헌금을 사용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직접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서로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또 하나님의 일꾼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헌금 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올바른 헌금 사용(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명목으로 드리는 헌금은 그 목적에 따라서 바르게 잘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사용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바로 앞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꾸짖으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이렇게 어렵게 헌금한 돈을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착복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교회의 헌금은 철저하게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개인의 화려한 삶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액수라도 거짓이 없이 바르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3) 헌금을 바치는 바른 자세
헌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너무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헌금을 즐겁게 바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세상의 물질에 대한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에 헌금을 바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참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헌금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주로 헌금함을 돌렸고 일명 매미채라고 하는 헌금함에 막대기를 달아서 각 사람 앞에 내밀었습니다.
그냥 헌금함을 지나치는 것은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빈 주먹을 헌금통 안에 집어넣었다가 꺼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돈이 없어서 외상입니다.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동전이라도 한두 개 있을 때는 지폐를 바치지 못하고 동전을 드린다는 것이 미안하고 창피해서 아주 깊이 손을 넣고 동전 소리가 나지 않게 했습니다. 하나님 나중에 돈을 벌면 큰 액수의 지폐로 많이 헌금하겠습니다.
그런 제가 청년이 되어서 드디어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아서 첫 십일조 헌금을 바쳤습니다.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자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헌금을 바치고 난 후에 전에 없던 각오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칭찬받고 복 받기 위해서 그 귀한 돈을 헌금으로 드렸는데 만약에 나쁜 짓을 한다면 그 헌금의 공로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 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돈 몇 푼 바친다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자신의 삶이 바뀌고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천국 백성이라는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늘 가난해서 겨우 동전 몇 푼이라도 어렵게 드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런 가난한 삶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하게 되고 천국을 더 사모하고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부자가 되어서 많은 돈을 헌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만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감사를 드리고 더 좋은 일에 귀한 돈을 사용할 줄 알면 됩니다.
우리의 삶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많이 바치는 일이 삶의 목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의 산상보훈을 통해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의 말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보물, 그것이 내가 가진 돈이든지 내가 아끼는 가장 소중한 것이든지 내가 가진 재능이든지 그것이 향하고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영혼이나 영원한 생명이 내가 아끼는 그것이 어디를 향해 있는 자를 알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끼는 소중한 것들이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있으면 여러분의 마음과 영원한 생명까지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금은 형편에 따라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재물이나 재능이나 아끼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여지기를 힘쓰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