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다니엘 6장 1-10절

 

 다리오가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의 하나이라 이는 고관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수무강하옵소서 /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서 1장부터 6장까지는 선지자 다니엘의 시대에 있었던 6개의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도 왕족의 신분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바베론의 정책에 의해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바벨론 정치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에게 평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방의 세계에서, 우상의 나라에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일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그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바로 그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고 있습니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데 바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1장에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주는 음식 앞에서 정결을 지키는 과정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느부갓네살이 꾼을 다니엘을 통해서 해석함으로 인간 세상의 역사에서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3장에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이 세운 거대한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풀무불에 던져지기까지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이 꾼을 다니엘이 해석하고 그 해석대로 왕에게 일어남으로 인해 하나님만이 인생의 모든 길을 주관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5장에서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이 하나님을 모욕할 때 하나님이 벽에 글씨를 쓰셨고, 다니엘이 이 글을 해석하고 그대로 성취됨으로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본문 6장에 나타난 사건은 3장에 나타난 사건과 유사합니다. 즉 여호와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대적들의 간계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자기를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의 왕까지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온 땅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성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 성령 하나님의 보증을 받은 자의 삶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성도라 부름을 받는 자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과 다음 주일에 연속해서 다니엘서 6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원하고 유일하신 왕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이 기지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좁은 길을 가는 삶입니다.

본문 1-2절에 다리오가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의 하나이라 이는 고관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바사와 메대의 연합군이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들어선 저 메대의 왕 다리오가 다니엘을 제국의 총리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였습니다. 따라서 메대는 바벨론의 상징적인 인물인 다니엘을 살려두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새롭게 세워진 제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운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아마도 디리오는 이 다니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그리고 그가 바벨론 제국에서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들을 감당했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바벨론을 정복한 후에 다니엘을 중용해서 제국의 총리로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다니엘의 삶을 너무 쉽게 볼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날 때, 다니엘의 나이는 80을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다니엘은 10대 후반 정도에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전체를 보면 그가 바벨론으로 끌려 온 이후 지금까지 고난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고위 관직을 지냈습니다. 그가 가진 권력이나 그가 누렸던 영화를 생각한다면 그는 아주 평안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그리고 이어진 왕국 페르시아 제국에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평안한 삶을 살았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의 삶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삶을 하나의 표현으로 한다면 좁은 길을 걷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있을까요?

1. 우상의 땅에서 여호와 신앙으로 사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바벨론 제국이나 이후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제국은 여호와 신앙이 없는 세상입니다. 저 세상은 분명 우상을 숭배하는 제국입니다. 우상의 문화로 가득한 제국입니다. 정치와 사회 전반에 우상이 만연해 있는 현실입니다. 그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그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우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삶은 결코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아닙니까? 특히 그가 고위 관직에 있었다면 그는 그 우상숭배의 문화에서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을 견고하게 지켰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좁은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변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은 온통 우상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우상은 그래도 우리가 쉽게 구별하고 참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고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우상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조금만 우리의 긴장을 풀어버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우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맙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그 우상의 세계에 빠졌으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의 세상에서 우리가 여호와 신앙,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삶,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오늘과 같이 영적으로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많은 사람이 외면합니다. 이 길은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부르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이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길은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좁은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이 길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 길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 길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길의 끝에 우리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이 있습니다.

2. 세상의 부귀영화에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바벨론 제국과 메대는 다니엘에게 강한 권력을 주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주었습니다. 사실 다니엘은 포로가 아닙니까? 멸망한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까? 그런 그에게 이러한 것들이 주어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지만 다니엘은 제국 안에 사는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그것도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이러한 자신의 환경으로 인해 그의 신앙이 흐트러지기 쉬운 상황에 놓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의 여호와를 향한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견고합니다. 본문 6장의 사건은 다니엘의 신앙이 한 때만 굳건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증명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다니엘의 일생을 통해 계속되어온 그 신앙의 면모가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일 뿐입니다.

그래서 Walt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러한 다니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보다 그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때를 더 크게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다니엘은 더 이상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갔으면서도 그는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남아 있었다.”

다니엘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은 그가 누리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다 포기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여호와 신앙과 그 무엇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충성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제국에 충성하면서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보다 기쁘게 여겼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일에 주저합니다. 아까워합니다. 세상의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는 자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성도라고, 제자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이 있을 때, 많운 것을 누릴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내 손에 많은 재물이 있을 때, 내가 세상에서 명예를 누릴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그 때 예수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이 많을 때, 우리는 예수보다도 세상에 더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내가 누리는 영화에 안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7-39) 이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좁은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본문 10절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노년에 엄청난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즉 여호와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사자굴에 던져져 사자의 밥이 될 것인가?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해결해야만 하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다니엘이 만난 문제는 대적들의 계략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흠을 찾고자 혈안이 되었던 저 대적들이 국사의 문제로 다니엘을 고발하고자 했지만,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다니엘을 옭아매기 위해서는 그의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고는 아무런 대안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왕을 이용해서 다니엘을 빠뜨리기 위한 함정을 팠습니다. 당시 제국의 왕은 신적인 존재로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저 대적들은 왕 다리오를 충동하여 한시적인 법을 제정하게 했고, 그 법을 통해서 다니엘을 고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들이 왕을 통해서 제정한 법의 내용은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을 거역한 자에게는 사자굴에 던져 죽이는 형별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7). 이 법은 즉시 공포되었고, 시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금까지 자신이 해 왔던 관습을 따라 자신의 집에 돌아가서 예루살렘을 향한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 지금 다니엘은 그 법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법에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알고도라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이 법의 내용도, 그리고 그 법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자신임도 분명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호와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이 이처럼 담대하게 여호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입혀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있을 때 천사장이 그에게 찾아와서 전했던 말씀 가운데서 확인이 됩니다. 다니엘 923절에서는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라고 했고, 1011절과 19절에서는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받은 은혜는 무엇일까요?

1. 세상은 변해도, 변하는 않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니엘의 삶을 우리가 쉬운 말로 표현하면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가나안 땅에서 왕족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정세가 혼란하고, 나라의 경제가 어려웠다고 할지라도 왕족으로 평안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2년 동안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다가 끝내는 함락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왕국 유다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온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정책에 의해서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화 정책에 의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그에게 넘어야 하는 큰 산이 가로막았습니다. 바로 왕이 주는 음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유다인으로 여호와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바벨론에 동화되어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니엘은 이 문제 앞에서 유다인의 자존심과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다니엘의 신앙을 지키주셨습니다.

이후로 다니엘이 바벨론의 권력에서 중심에 섰습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이 자기 사람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이나 왕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벨사살 왕 때에 벽에 쓰여진 하나님의 경고의 글을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늘 본문 6장에 등장하는 사건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일들을 결정하기도, 실행하기도 어렵습니다. 심지어 사자굴에 던져지는 상황을 이겨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니엘과 함께하셨습니다. 그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저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왕의 조서 앞에 서 있는 다니엘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과도 함께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니엘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그를 붙들어주셨고, 흔들리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변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해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아무리 강한 권력도 언젠가는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은혜 안에서 영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에 변하고 변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나라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그토록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은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2. 우겨쌈을 당해도 견고하게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대적들은 더 집요하게 다니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저 대적들은 그러한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함정을 파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나타난 모여(רְגַשׁ)”라는 표현은 떠들석하다, 어수선한 가운데 모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바벨론의 고위 관리들이 단정한 모습이 아닌 무법한 폭도들과 같이 모여서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의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 21절에서 분노하다(רָגַשׁ)”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를 대적하기 위해서 이방 나라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소란스럽게 모였던 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충신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인 사악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이 사악한 계교가 다니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왕을 충동해서 조서까지 만들고 공포했지만, 다니엘은 그 조서의 내용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이라고 하는 형벌, 곧 잔인한 죽음의 형벌이 기다렸지만 다니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그 은혜 외에는 설명할 대안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저 대적자들은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다니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평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은혜입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저 세상도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세상의 사상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에워싸고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이 흔들리도록 하려고 합니다. 예수가 아닌, 십자가가 아닌, 복음이 아닌 세상의 소리를 따라가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에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도록,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도록, 오직 복음만으로 만족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고후4:7-11).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고백이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온 세상에 다 넓은 길로 갈지라도 우리만이라도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믿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은혜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아무리 에워싸도 우리를 견고하게 세워주시는 은혜입니다.

원하기를 우리 모두가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삶으로 나타내고 증명해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