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고전 15;9-11
나는 使徒 中에 가장 작은 者라 나는 하나님의 敎會를 迫害하였으므로 使徒라 稱함 받기를 堪當하지 못할 者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恩惠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恩惠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使徒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恩惠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傳播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오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은혜”라고 하는 단어가 포함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은혜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신에게 묻는다면 자신이 있는 성도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너무 쉽게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그 표현이 가지는 의미, 곧 그 표현이 지금의 자신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혜(χάρις)”란 ‘선물(present)’을 가리킵니다. 아무런 대가가 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선물을 가득 주면서도 그 자녀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주는 것으로 큰 기쁨을 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선물을 주시고도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누리면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삶에는 기쁨과 감사의 시간이 많습니까? 아니면 불평과 불만의 시간이 많습니까? 우리는 분명 은혜 안에서 살아간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기쁨이 충만한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감사가 충만한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의 삶에는 기쁨이 없을까요? 우리의 입술에는 감사가 없을까요? 이는 우리에게 은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넘치는 은혜 가운데서 사는데, 우리가 그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너무나도 빨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문제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망각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교회인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함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간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셨는데 맨 나중에는 사도 바울 자신에게까지 나타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고백하는 바울의 고백은 단지 바울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고백을 다시금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은혜를 성도 안에서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 앞에 나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옛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옛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과거의 모습,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바울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7장 이후에 나타나는 사울의 모습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거리가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산 자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잔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오기 위하여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다메섹을 향하여 갔던 사람입니다. 사울의 옛 모습은 정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하수인이었고, 그에게는 조그마한 동정의 여지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져서 구원의 여망이 없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은혜로 덧입혀 주셨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이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핍박자 사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는 사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로 가득 차 있는 사울에게 진정한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변화시키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울의 옛사람이 완전히 깨어져 버렸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사도 바울에게는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의 구원 문제만큼은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일지라도 그 선행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고행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이 고행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예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예수를 통해서, 그 예수를 믿음으로, 그 예수 안에 생명을 얻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우리 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죄 뿐인데, 그리고 그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버린 존재들이었을 뿐인데,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결국 오늘의 우리 자신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이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사울과 어떤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죄에 거하는 자였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대상이었고,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는 자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의 새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 과거의 하나님 밖에 있을 때의 나는 죽어서 없어져 버렸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과연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되었습니까? 과연 무슨 공로를 쌓았기에 이렇게 되었습니까? 과연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하였기에 이토록 큰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느냐는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 우리의 입은 완전히 닫힐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라는 말뿐입니다.
결국 내가 지금의 나로 된 것 즉 내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Ⅱ.내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받은 사명이 곧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사도라고 칭함을 받기에 너무나도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하여 행한 행동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기에 그 자신 이제 와서 그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때로는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자신이 한 순간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적은 없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든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이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요, 자신의 과거가 너무나도 지금의 자신과는 비교되기 때문에 내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겸손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칭함을 받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맡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고 그는 그 맡은 일에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능력도 없고 재능도 없는 자에게 일을 맡기고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자격이나 능력이나 재능이 없는데 주님은 나에게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가 아닙니까?
본문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 경력으로 인하여 어찌보면 주님 앞에 나서기조차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는 오히려 주님의 책망을 받고 한 쪽에서 조용히 은거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주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것도 주님은 바울에게 최초의 선교사로서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셨으니 사도 바울에게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어찌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부인해도, 내가 변명해도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우리 광성교회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일꾼으로 부르시고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딤전1:12). 마땅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 귀한 일꾼의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만으로도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크나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부르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하심은 어찌 된 은혜입니까? 나같이 연약하고 무력한 자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시고, 교회를 위해 큰 일을 맡기심은 어찌 된 은혜입니까?
이처럼 바로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심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Ⅲ.내가 수고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맡고 그 일 앞에 수고의 땀을 흘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를 조심스럽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그는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많은 수고를 했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의 수고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엄청난 거리를 여행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3차에 걸친 전도 여정을 진행했는데, 그 거리를 합치면 엄청납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통이 발달한 시대에도 쉽지 않은 거리를 도보로, 짐승을 타고, 때로는 배를 이용해서 다녔습니다. 때로는 들판을 지났을 것입니다. 사막과 같은 곳도 지났을 것입니다, 산을 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가 지난 많은 지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 힘이 드는 곳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길을 오직 복음을 위해서 걸었습니다.
바울, 그는 복음을 위하여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했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고후11:24-27).
하지만 그는 복음 때문이라면 어디든 갔고, 복음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사역은 전무후무하도록 많은 양의 사역입니다. 그리하여 가고 오는 모든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도 바울만큼 수고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수고의 땀을 흘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본문에서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어찌보면 만삭되지도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 이러한 엄청난 일을 맡기심도 은혜였지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 내세우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조그만 일을 해 놓고도 그 일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해 놓은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이 나의 힘이나 지혜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이모든 일을 나에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사실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한들 사도 바울만큼 일하겠습니까? 그는 그토록 많은 일을 해 놓고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함으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그만한 일을 해 놓고도 모든 영광을 나 자신이 다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까? 오늘 하루의 삶을 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 예배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나의 공로는 조금도 없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죄악의 삶만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조차도 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겸손히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한 아름다운 열매의 결과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열매까지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나의 것을 주장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한 고백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역의 결과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든 성도들도 바로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이러한 고백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제가 요즘 자주 듣는 찬양이 하나가 있습니다. 손경민 목사님이 작사, 작곡한 찬양인데 “은혜”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그렇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니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한 순간도 없습니다. 나의 영적인 신분의 변화나, 주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주님 자신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나, 내가 그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나 같은 자에게 맡기심을 감사하고 충성하는 자에게 주님은 또다른 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함으로 날마다 하나님께만 온전한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