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38)
본문 : 벧전 3:20-22
제목 : 심판의 물과 구원의 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지난주에 공부한 18, 19절 말씀에는 좀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18절 말씀 끝 부분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잘못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죽으셨지만 다시 살기는 육체는 다시 살지 못하고 영으로만 다시사신 것이라고 오해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육신을 가진 몸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다만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은 그 몸이 우리가 가진 이런 몸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이 몸은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적인 몸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19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옥으로 가셨다고 하셨는데 그 옥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또 무엇을 선포하셨는지 잘 알 수 없는 말씀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본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옥을 연옥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죄를 짓고 연옥에 가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회계하면 되고 또 자손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선을 행하면 조상들이 다시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 가지고 타락한 중세교회에서 돈벌이 잘 했습니다.
돈 가져다가 바치면 조상이 천국에 간다는데 그것 안할 자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평소에 불효자들도 죽은 다음에는 수의나 관이나 묘는 아주 비싸게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이해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는 영으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특별히 노아시대에 노아에게 역사하셔서 노아시대의 패역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신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들은”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 그들이란 예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전도하실 때 그 전도를 받은 그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로 심판을 받았고 그 중에 노아가족 여덟 명은 그 물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그 물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심판의 물과 구원의 물”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1.노아시대의 심판의 물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물이 없으면 모든 생물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물을 아주 소중하게 사용을 하셨습니다.
물을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하늘 위의 물이 노아홍수 이전에는 우리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위의 물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어서 태양에서 나오는 나쁜 광선들을 차단하고 지구의 온도를 알맞게 조정을 해서 사람들이 천년을 살고 공룡과 같이 등치가 큰 초식 동물들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홍수 때 그 하늘의 물이 지구로 내려와서 사람을 죽게 하고 또 그 이후 시대의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서 창조된 물이 인간들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들이 죽게 되고 인간들이 물로 인해서 누리는 혜택들도 많이 줄었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사람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한꺼번에 죽게 하셨을까요?
웬만하면 참으셨을 텐데 참 사람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니까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근심하시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 악한 죄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결혼을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들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경건한 셋의 후손과 살인자 가인의 후손들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었는데 경건한 후손인 셋의 후손들이 살인자이 후손이고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가인의 후손들과 통혼을 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타락을 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따로 구별해서 세우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는데 그들마저도 서로 결혼을 통해 섞이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처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통혼이 경건한 백성으로 유지시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만든 것입니다.
요즘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서로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일민족을 자랑하던 우리나라도 외국인들과의 결혼 때문에 단일민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금 시골에 가면 장가가지 못한 총각들이 저 베트남 필리핀 구소련의 여러 나라 여자들과 결혼을 해서 다문화 가족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0-20년 후에 우리가 고향이라고 시골에 가면 거기에는 고향 후배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문화생활을 하는 외국사람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심각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히 모슬렘 신앙을 가진 여자들이 섞여 있어서 신앙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안 되려면 우리 아가씨들이 도시에만 살려고 하지 말고 시골로 시집도 좀 가야 되고 정 안되면 외국 여자들보다는 중국이나 소련에 있는 우리 조선족들과 결혼을 하도록 권장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심성이 비슷해서 기독교 신앙도 잘 받아들이고 외모로도 별 다르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 바로 작정하고 바로 시행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오래참고 기다려주셨다고 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기간을 120년을 주시고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면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전도를 받지 않고 그 방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000년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구원을 받은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했습니다.
노아 스스로가 그렇게 의롭고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다시 번역을 하면 "그러나 노아는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은 것은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노아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모두다 죄를 짓고 악하게 사는 것은 비슷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더 악하면 악했지 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 까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37-38)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시대나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야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앙을 중요시하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려면 먹고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동물적인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잘남이나 우리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하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예수님 부활이후 구원의 물
본문 21절 말씀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불안해하는 노아가족에게 구름사이의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그때처럼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오히려 그 물로 심판이 아닌 구원의 표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물은 곧 세례라고 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물은 우리를 구원하는 증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원래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것처럼 물을 뿌려 약식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침례교 사람들처럼 침례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에 들어가서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물에서 나오게 함으로 세례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면서 죄로 인해서 죽을 우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면서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을 받은 죄인들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심판인 죽음에서 다시 살게 된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는 물을 머리에 뿌리는 약식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노아홍수시대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 천국백성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이미 대부분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세례란 그렇게 간단하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모를 때 세례를 받아서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서례를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다짐하시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례란 육체의 더러움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세례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해서 죄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죄성은 여전히 우리의 몸에 남아 있어서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나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악한 것들이 깨끗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죄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남아 있어서 죽는 날까지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르게 살려고 하면 몸부림을 쳐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려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수록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삶을 살아지지 않고 싫어하는 악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곤고한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세례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에 가지고 있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옛날 번역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의 육체에 더러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우리의 죄가 너무 악해서 우리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하고 법을 다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또 심지어 이렇게 죄 사함을 받는 표인 세례를 받아도 항상 의로운 사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 그 긍휼히 여기심이 아니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구속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 그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고 좀 바르게 산다고 해서 교만하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우리는 항상 죄를 짓게 되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심판하시던 그 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표로 삼아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그 자비하심으로 이런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립니다.
3.심판의 물이 구원의 물이 되게 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라
본문 22절 말씀에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더 바르게 알고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은 후에 예수님을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을 잊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을 높이지 않고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들이 영광을 받고 자기들이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의 목사라고 해서 자기가 예수님의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대우를 받고 화려한 삶을 삽니다.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얼마나 권세를 부리고 사는지 모릅니다.
자기들이 하는 말이 곧 법이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죄의식이 없어졌고,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도, 영원한 천국도,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의 삶도, 고난을 자처하면서 사는 것도 이미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주의 종의 모습이 그들에게서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우리 주님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초라한 모습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셔서 천상천하의 모든 천사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을 하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감히 그 예수님을 함부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대합니까?
그 분이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에 지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사람처럼 대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살려주니까 너무 건방져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따라하면 안될 것입니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 주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물로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못지않은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심판의 물을 구원의 물로 바꾸어주신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물을 구원의 징표로 바꾸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높으신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그 은혜와 자비하심을 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전 3:20-22
제목 : 심판의 물과 구원의 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지난주에 공부한 18, 19절 말씀에는 좀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18절 말씀 끝 부분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잘못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죽으셨지만 다시 살기는 육체는 다시 살지 못하고 영으로만 다시사신 것이라고 오해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육신을 가진 몸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다만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은 그 몸이 우리가 가진 이런 몸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이 몸은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적인 몸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19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옥으로 가셨다고 하셨는데 그 옥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또 무엇을 선포하셨는지 잘 알 수 없는 말씀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본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옥을 연옥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죄를 짓고 연옥에 가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회계하면 되고 또 자손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선을 행하면 조상들이 다시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 가지고 타락한 중세교회에서 돈벌이 잘 했습니다.
돈 가져다가 바치면 조상이 천국에 간다는데 그것 안할 자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평소에 불효자들도 죽은 다음에는 수의나 관이나 묘는 아주 비싸게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이해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는 영으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특별히 노아시대에 노아에게 역사하셔서 노아시대의 패역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신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들은”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 그들이란 예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전도하실 때 그 전도를 받은 그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로 심판을 받았고 그 중에 노아가족 여덟 명은 그 물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그 물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심판의 물과 구원의 물”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1.노아시대의 심판의 물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물이 없으면 모든 생물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물을 아주 소중하게 사용을 하셨습니다.
물을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하늘 위의 물이 노아홍수 이전에는 우리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위의 물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어서 태양에서 나오는 나쁜 광선들을 차단하고 지구의 온도를 알맞게 조정을 해서 사람들이 천년을 살고 공룡과 같이 등치가 큰 초식 동물들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홍수 때 그 하늘의 물이 지구로 내려와서 사람을 죽게 하고 또 그 이후 시대의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서 창조된 물이 인간들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들이 죽게 되고 인간들이 물로 인해서 누리는 혜택들도 많이 줄었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사람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한꺼번에 죽게 하셨을까요?
웬만하면 참으셨을 텐데 참 사람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니까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근심하시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 악한 죄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결혼을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들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경건한 셋의 후손과 살인자 가인의 후손들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었는데 경건한 후손인 셋의 후손들이 살인자이 후손이고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가인의 후손들과 통혼을 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타락을 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따로 구별해서 세우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는데 그들마저도 서로 결혼을 통해 섞이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처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통혼이 경건한 백성으로 유지시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만든 것입니다.
요즘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서로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일민족을 자랑하던 우리나라도 외국인들과의 결혼 때문에 단일민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금 시골에 가면 장가가지 못한 총각들이 저 베트남 필리핀 구소련의 여러 나라 여자들과 결혼을 해서 다문화 가족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0-20년 후에 우리가 고향이라고 시골에 가면 거기에는 고향 후배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문화생활을 하는 외국사람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심각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히 모슬렘 신앙을 가진 여자들이 섞여 있어서 신앙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안 되려면 우리 아가씨들이 도시에만 살려고 하지 말고 시골로 시집도 좀 가야 되고 정 안되면 외국 여자들보다는 중국이나 소련에 있는 우리 조선족들과 결혼을 하도록 권장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심성이 비슷해서 기독교 신앙도 잘 받아들이고 외모로도 별 다르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 바로 작정하고 바로 시행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오래참고 기다려주셨다고 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기간을 120년을 주시고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면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전도를 받지 않고 그 방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000년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구원을 받은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했습니다.
노아 스스로가 그렇게 의롭고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다시 번역을 하면 "그러나 노아는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은 것은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노아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모두다 죄를 짓고 악하게 사는 것은 비슷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더 악하면 악했지 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 까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37-38)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시대나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야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앙을 중요시하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려면 먹고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동물적인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잘남이나 우리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하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예수님 부활이후 구원의 물
본문 21절 말씀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불안해하는 노아가족에게 구름사이의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그때처럼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오히려 그 물로 심판이 아닌 구원의 표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물은 곧 세례라고 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물은 우리를 구원하는 증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원래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것처럼 물을 뿌려 약식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침례교 사람들처럼 침례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에 들어가서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물에서 나오게 함으로 세례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면서 죄로 인해서 죽을 우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면서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을 받은 죄인들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심판인 죽음에서 다시 살게 된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는 물을 머리에 뿌리는 약식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노아홍수시대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 천국백성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이미 대부분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세례란 그렇게 간단하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모를 때 세례를 받아서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서례를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다짐하시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례란 육체의 더러움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세례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해서 죄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죄성은 여전히 우리의 몸에 남아 있어서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나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악한 것들이 깨끗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죄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남아 있어서 죽는 날까지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르게 살려고 하면 몸부림을 쳐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려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수록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삶을 살아지지 않고 싫어하는 악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곤고한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세례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에 가지고 있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옛날 번역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의 육체에 더러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우리의 죄가 너무 악해서 우리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하고 법을 다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또 심지어 이렇게 죄 사함을 받는 표인 세례를 받아도 항상 의로운 사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 그 긍휼히 여기심이 아니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구속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 그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고 좀 바르게 산다고 해서 교만하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우리는 항상 죄를 짓게 되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심판하시던 그 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표로 삼아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그 자비하심으로 이런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립니다.
3.심판의 물이 구원의 물이 되게 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라
본문 22절 말씀에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더 바르게 알고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은 후에 예수님을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을 잊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을 높이지 않고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들이 영광을 받고 자기들이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의 목사라고 해서 자기가 예수님의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대우를 받고 화려한 삶을 삽니다.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얼마나 권세를 부리고 사는지 모릅니다.
자기들이 하는 말이 곧 법이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죄의식이 없어졌고,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도, 영원한 천국도,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의 삶도, 고난을 자처하면서 사는 것도 이미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주의 종의 모습이 그들에게서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우리 주님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초라한 모습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셔서 천상천하의 모든 천사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을 하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감히 그 예수님을 함부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대합니까?
그 분이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에 지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사람처럼 대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살려주니까 너무 건방져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따라하면 안될 것입니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 주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물로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못지않은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심판의 물을 구원의 물로 바꾸어주신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물을 구원의 징표로 바꾸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높으신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그 은혜와 자비하심을 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