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47)
본문 : 막 11:15-18
제목 :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15.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상놈(常놈)이라는 욕으로 쓰기도 하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양반과 상인이라는 조선 시대의 신분 계급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양반은 높은 계급의 관리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정의 관리는 글을 쓰는 문과반과 무기를 쓰는 무과반이 있었는데 이 두 반을 양반이라고 하고 지배계층과 그 가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상인은 양반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보통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인이라는 말이 신분이 낮은 사람 본데없고 버릇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비하해서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상놈(商놈)이라고 하여 상인을 낮추어서 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우리나라는 그 직업의 서열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했습니다. 선비(士)가 제일 좋은 직업이고 그다음이 농사짓는 사람(農) 그다음이 기술자(工) 그다음이 장사하는 사람(商)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사를 제일 천한 직업이라고 했고 천한 사람을 일컬을 때 상놈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부모님들이 그런 상놈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자신은 농사를 짓거나 뭘 만들거나 장사를 하더라도 자녀들은 선비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식만큼은 공부를 많이 해서 양복을 입고 펜대를 잡고 관리자로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요즘은 그 순서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장사를 제일 좋은 직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장사를 하고 사업을 하고 기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제일 좋은 직업으로 제일 높은 신분으로 생각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을 상놈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작은 가계를 해도 사장님이라고 부르고 기업을 경영하시는 분은 회장님하고 존대합니다.
요즘은 돈의 가치가 너무나 높고 돈의 위력이 강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양반이라고 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하위계층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성공한 사람이라 하여 존경하고 따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를 좋은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돈이 우상이 되고 돈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도 간에 교제하는 곳이고 그리고 힘을 모아서 선한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고 나서 부수적으로 보너스로 얻는 것이 세상의 복을 받고 부자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적도 세월에 따라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가장 큰 목적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장삿속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자체가 회사처럼 지도자들의 이익을 위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농담으로 교회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주식회사가 되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재벌기업이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거대한 기업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기도해야 할 성전이 장사꾼들의 영업장소가 되어서 심지어 남의 돈을 빼앗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1.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본문 15~16절에 “15.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그 첫날인 월요일에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 보니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헌금할 돈을 바꿔 주는 사람, 제물로 드릴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화가 나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시면서 그들을 성전 밖으로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장사할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전 안에 장사꾼들이 생긴 원인은 성전에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20세가 되면 일 년에 반 세겔씩 성전 세를 내게 해서 그 돈으로 성전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반 세겔의 돈은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반 세겔은 노동자의 이틀분 품값이라고 했으니까 거액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은 인건비가 비싸졌으니까 꽤 많은 돈 같지만, 당시에 노동자 품값은 매우 적은 돈이었습니다.
문제는 성전 세를 바칠 때 반드시 유대인의 돈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멀리 외국에서 온 유대인이나 당시 로마 시대여서 로마의 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환전을 해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환전상이 생겼고 사람들은 밖에서 환전해주는 사람을 찾을 필요 없이 성전에 오면 다 바꿀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편리한 것이었습니다.
비둘기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바치는 제물 중에 소나 양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으로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소나 양을 파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없어서 비둘기만 팔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거기에 장소가 협소해서 소나 양은 가까운 곳에서 가져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나 양이나 비둘기는 자기 집에서 기르던 짐승 중에서 흠이 없는 좋은 것을 골라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오는 사람은 성전까지 짐승을 끌고 오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더욱이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짐승을 끌고 와서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제사에 드릴 수 있는 흠 없는 짐승으로 합격해야 제사 드릴 수 있었고, 불 합격하면 다시 가서 다른 짐승을 끌고 와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짐승을 사면 이미 합격을 받은 짐승이기 때문에 그런 번거로움이 없어지고 편리하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편의를 제공하는 환전상이나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환전해주고 판매하는 사람도 내어쫓으시고 그들에게 환전하고 비둘기를 사는 사람도 내어쫓으셨다고 했습니다.
환전해주고 판매하는 사람들은 비싼 수수료를 받고 비싸게 팔아서 많은 이익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보통 시중에서 지불하는 수수료나 가격보다 엄청 비싸게 해서 편리를 도모한다는 것을 내세워 이익을 챙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많은 이익을 남겨야 했던 이유는 그 장소를 사용하기 위해서 제사장들에게 많은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성전의 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장사꾼들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성전 지도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장사꾼보다 더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어느 종교나 종교의 타락은 이런 상업적인 것이 종교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신을 섬기거나 올바르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장사꾼이고 강도의 소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성전이나 교회가 상업적이 될 때 타락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유대교가 무너진 것도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보다 자기들의 이익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면죄부를 팔고 성전건축헌금을 강요해서 지도자들의 배를 채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 복음이 아닌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치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교회도 점점 하나님께 외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서 환전을 해주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과 함께 그들에게 물건을 사려고 하는 사람도 같이 쫓겨났습니다. 왜 성전 세를 바치고 왜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잊어버리고 그저 편리하게 제물을 마련해서 쉽게 제사만 드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전 세는 출애굽기 30장에 그 근거를 둡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것을 모세를 보내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이런저런 규례들을 제정해주셨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지금 성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 성막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쓰기 위해서 20세 이상 남자는 부자나 가난한 자가 똑같이 반 세겔을 하나님께 바치게 했습니다. 그 성전 세를 ‘생명의 속전’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보전받은 죄 사함의 값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마지막 재앙이 모든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살려주셨습니다. 그 생명 보전에 감사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 생명의 속전이고 성전 세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그 성전 세를 낼 때 왜 성전 세를 내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를 모르니까 그냥 환전소에서 돈 바꾸어서 세금 내듯이 냅니다.
성전 세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값이라고 생각한다면 세금을 바치는 자세가 달라야 했을 것입니다. 평소에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미리미리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여 소중하게 간직하였다가 정성스럽게 감격하며 드릴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도 그 의미를 알고 바쳐야 하는데 그냥 합격품 짐승만 찾으면 됐고 많이만 바치면 좋은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죄인은 하나님께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대신 잡아서 죽여 제물로 드림으로 일시적이나마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짐승은 내가 그 짐승처럼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인인데 나 대신 짐승을 잡아 비참하게 죽이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은 후일 우리 죄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죽이고 죄 사함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나 대신 죽어주심으로 나의 죄가 완전히 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에 쓰일 짐승은 내가 키운 짐승 중에서 흠이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냥 성의 없이 돈 주고 사서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칠 짐승을 미리 준비하고 정성스럽게 키운 후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전 세나 제사드릴 짐승은 바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헌금들을 바칩니다. 우리가 헌금을 바칠 때도 성의 없이 그저 헌금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늘 미리 준비하고 평소에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헌금이 쓰여질 때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쓰면 안 됩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헌금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차리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2.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본문 17절에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56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번제와 희생제를 드리게 하신 것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제사장이나 장사꾼들이 돈을 벌게 하기 위한 성전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참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회개, 신앙고백, 감사, 하나님의 말씀 묵상, 자신을 돌아보는 것,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여쭈어보는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여쭈어보는 것, 내가 겪는 고통과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 필요한 것들을 간구하는 것…….
이런 많은 것들 가운데서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기도란 무엇일까요? 이런저런 모든 것을 말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전에서 교회에서 해야 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기도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친 것이 기도요 찬송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당신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한 호소가 성전에서 해야 할 기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때도 이 호산나가 외쳐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21:15)라고 했습니다.
성전이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나 모든 것이 사실은 예수님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성전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에서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호산나 기도입니다. “우리가 당신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그 구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기도도 이 구원이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이미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호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을 통해 받은 영원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본문 18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유대교의 핵심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고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집전하는 제사가 주는 핵심적인 의미도 메시야를 통한 구원입니다.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구약성경의 핵심도 메시야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그 핵심 주제인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면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돈에 눈이 멀었고 마음이 부패해버렸기 때문에 보면서도 보지 못했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어떻게 제거해버릴까만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더 깊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복음을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졌고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여 성경을 보면서도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하고 다닙니다.
성도들도 교회에 다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예배를 드리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렇게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의무적으로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 재미에 빠져서 복음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의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사로운 세상 이익 때문에 교회가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본분인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는 교회, 구원의 은혜를 뜨겁게 찬송하며 예배드리는 참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