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3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43)
본문 : 막 10:35-40
제목 :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혼동하기 쉬운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것 같기도 하고 저런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것이면서 그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목적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바르게 살고 그 결과로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천국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이 세상에서는 그 나라를 준비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삶을 살면서라도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보편적인 생각은 영원한 천국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복을 받아서 잘 살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바른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잘 살고 천국에도 가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어디에다가 더 중점을 두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강조점에 따라서 신앙의 형태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비슷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축복이나 행복이 내가 복 받고 내가 누리고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축복은 고통스럽고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주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사는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가난하게 사는가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를 위해서 이기주의로 사는가 다른 사람을 위한 이타주의로 사는가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르게 정립될 때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죽 살펴보면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이런 문제로 갈등이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큰 뜻을 아직 제자들이 잘 깨닫지 못해서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엉뚱하게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핵심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살펴보고 그 잘못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서론에 말씀드린 혼동하기 쉬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본문 35절에서 37절에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1)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 부른 제자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부른 제자가 오늘 본문의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입니다. 당시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라는 것을 특정하기 위해서 세베대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네 사람의 제자를 맨 먼저 부르신 것은 그들을 중심으로 중요한 일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나올 때나 중요한 일을 할 때 이 네 사람의 이름은 먼저 등장합니다.
이 네 제자의 특징은 모두가 갈릴리 어부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네 사람을 부를 때 이들은 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를 잡을 그물을 정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들은 다 같이 배와 그물과 심지어 가족까지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들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대부분은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세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남쪽에는 유다이고 중간에는 사마리아이고 북쪽에는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예루살렘은 남쪽 유다 지방에 있었고 거기에 성전과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비교적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들이 유다 지방에 있었다고 하면 갈릴리 지방에는 비교적 성경에 무지하고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나셨다고 하니까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비웃을 정도로 무시 받는 곳이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쟁쟁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제치고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는지 잘 모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리 떠나서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나 똑똑한 사람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이 유리한 대로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잘못을 지적하고 바르게 가르치려고 해도 도무지 남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잘 모르는 사람을 부르셔서 가르치고 따르게 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으로 보입니다.
2)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사람들은 조금만 잘해주면 금방 교만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겸손하게 순종할 줄 알고 좀 부족한 사람을 제자로 불러 주셨는데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자만감에 금방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아주 자신감 있게 자기들이 원하는 요구사항을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허락해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강요하듯 요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했는데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들이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교만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뭐라고 하든지 따지지 말고 거절하지 말고 꼭 그렇게 해 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자신들을 불러 주셨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어떤 고난을 받으신다고 하셨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족한 죄인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죄인을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의 고귀함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데 떼를 쓰고 기도합니다.
3)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그런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다고 해도 결국은 다시 살아나셔서 예루살렘에다가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세우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하나님 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을 가장 권력자가 앉는 자리로 생각했고 좌편을 그다음 권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자리를 야고보와 요한이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그 자리를 자기들에게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야고보와 요한의 이런 모습에서 오늘날 미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떼를 뜨는 사람,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 흉악한 죄인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영광스러운 삶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본문 38절에서 40절에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이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들으시고 그들이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시면서 되묻는 말씀입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잔은 가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잔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주로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고난의 잔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을 너희도 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세례 역시 여기서는 우리가 받는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괴로움과 고난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받을 고난을 세례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4:50)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이 없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2)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너희도 당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이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인지 그냥 권력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보좌 우편이라는 자리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하겠느냐는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이 진짜로 그런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같은 그런 고난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그들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1-2)라고 했습니다. 헤롯 왕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교인들 중에 몇몇 사람을 칼로 죽였는데 거기 야고보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중요한 일도 수행했지만 그로 인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비록 열두 제자 중에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자연사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많은 고난도 당하고 말년에는 밧모섬에 유배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환난에 참여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그런 환난을 참고 견뎠고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를 당했으나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장래의 일을 알게 하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알게 모르게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허랑방탕하게 살지 못하고 늘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할 수 있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환난이 와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 고난 후에 우리가 받을 영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에 답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좀 특별한 의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자리는 즉 영원한 천국에서 왕 노릇 하면서 사는 것은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했거나 당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그 사람이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 준비해두셨기 때문에 그 특별한 사람이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라고 하셨는데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 준비하셨고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고난을 참고 견디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자리를 준비하셨다고 믿습니다. 순교자나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그런 고난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11:35-37)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더 좋은 자리 더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더 큰 고난을 당하고 더 큰 어려움을 당하고 더 끔찍한 순교를 당하기 위해서 애를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는 말씀의 뜻은 그런 노력들이 그런 험한 순교가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내세에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제일 우선이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위해서 그 자리를 준비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한 자리에 앉을 의인으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를 져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할 뿐이며 작은 희생이나 헌신으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런 고난이나 희생이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은혜에 감격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받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보좌에 앉아서 왕 노릇을 하는 것 같은 영광스러운 자리가 너무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산다고 해도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를 주심에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이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끝까지 지키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