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42)
본문 : 막 10:32-34
제목 :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로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세 번째로 예고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난 예고를 하는 말씀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라고 하셨고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예언하신 그 수난의 예언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루어지고 있고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께서 당하실 수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올라가셔서 당하실 그 수난이 어떤 것이며 무슨 의미를 주는 말씀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본문 32절 상반 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루살렘은 참으로 특별한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히 불러 따로 세우시고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와서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 이 가나안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그곳에 특별한 성을 만들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역사가 매우 길고 복잡해서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살았던 아주 뜻깊은 도성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에서 각기 다른 세 종교가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곳을 성지로 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는 당연히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성이고 성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도 역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고 예수님도 그 활동무대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과는 거리가 먼 코란을 경전으로 믿고 따르는 이슬람교도 자기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출발지요 성지라고 생각합니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으로 또 야곱으로 이어지지만, 이슬람교는 여종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의 후예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주인이시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제사나 율법이나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로 남아 있으며 예수님과 거리가 먼 이슬람교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런 뜻을 잘 모르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이나 제사나 율법을 가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은 만왕의 왕으로서의 입성이 아니라 반대를 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길을 알면서도 보란 듯이 올라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의 성전은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특별한 곳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말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유대교처럼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이 교회를 점령하고 우리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이교도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중심이 아니라 다른 이교도나 이단에서 온 잡다한 것들을 가지고 정통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하는 것은 그런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바른 진리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서 구약성경 말씀을 통해서 율법이나 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2)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늘 스승이 앞서가시고 제자들이 따라가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지금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 길이 평소에 보통 사람들이 가는 그런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서가시는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면서 죽음의 길을 가면서 앞장서서 먼저 가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길이라면 맨 뒤에서 억지로 따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의 길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험하고 힘든 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일임을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앞장서서 고난의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3) 그들(제자들)이 놀라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들이 누구인지 본문에서는 설명하지 않아서 누구를 말하는지 잘 모르지만 주석가들은 대부분 그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앞장서 가는 예수님을 보고 왜 놀랐는지 본문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난의 길을 선뜻 앞장서 가시는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일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두 번씩이나 예수님의 수난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 수난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라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을지 정말 그런 일이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귀신도 쫓아내시고 불치의 병도 고치시고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구원자라고 하신 분이셨는데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진지하게 수난을 말씀하셨는데도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그런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을 했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수난 예고를 듣고도 서로 누가 크냐고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곧 다가올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한 사람은 예수님의 우편에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형제 중에 한 사람은 우의정이 되고 한 사람은 좌의정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그 일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앞장서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을 보면서 놀라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과 죽으심의 의미를 알면서도 놀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미 잘 아는 일이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기에 늘 깜짝깜짝 놀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가르친 저도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위해서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정말로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일을 당연한 일처럼 생각합니다. 별로 놀라지도 않고 소중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늘 그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죄를 두려워하고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4)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병들면 고쳐주셨고 풍랑이 일면 잠잠하게 해 주셨고 먹을 것이 없으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만 있어도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었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다고 하면 또다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면 해결할 수 없이 어려움을 당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붙잡혀서 사형을 당하시면 분명히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따라가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서 당할 고난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면 그 후에 성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멸망시키실 것인가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경험들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비를 내리지 않으시기도 하시고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게도 하시고 이웃 강대국을 통해서 나라를 망하게도 하셨습니다.
사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사람에게는 죄에서 구원받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과 후손들이 형벌을 받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시위를 하고 그 죄를 자신들과 후손에게 돌리라고 겁 없이 외쳤다가 엄청난 형벌을 받았습니다. 2천여 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아야 했고 나치 독일에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의 근거가 되고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기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지옥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본문 32절 하반 절에서 34절에 “32.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당시에 하나님의 일에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사장 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 학자라고 하기도 하는데 성경을 연구하여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연결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 말씀으로 설교를 하는 목회자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인간에게 전하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를 몰라보고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행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지위를 이용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욕심을 차리기에 급급했고 오늘날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엉터리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그 핵심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이단이나 거짓 선생에 불과합니다.
2)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시킬 권한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당국에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볼 때 로마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짐승과 같이 천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 개나 돼지같이 여기는 이방인에게 동족을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넘겨준다는 것은 참으로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비열한 짓까지 서슴지 않고 했던 것입니다.
3)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여기 그들은 로마인들을 말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주장에 따라서 결국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합니다. 그들이 사형수에게 능욕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이는 것은 그냥 당연히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현장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기 때문에 더이상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수치와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런 수치를 당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별로 감격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4)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우리는 여전히 절망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것도 신비한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죄로 인해서 비록 이 세상에서는 비참하게 죽어야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죽음 뒤에 부활과 영생을 보장해주심으로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교할 수는 없지만 크고 작은 고난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비웃음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주는 부활과 영생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참고 견디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부활과 영생의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어떤 시련이 와도 이 믿음만은 끝까지 지켜서 영원한 천국 백성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