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35)
본문 : 벧전 3:13-14
제목 :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또”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라는 말보다 ”그렇다면“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앞 절의 말씀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신 대로 바로 앞 12절에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를 살펴보시고 보호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은 즉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말씀은 이 말씀을 전제로 그러므로, 그렇다면 열심히 선을 행하여야 하고 핍박을 받더라도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모든 성도님들이 선을 행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 핍박을 당하더라도 의를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해를 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1.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해하리요.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 사람하면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절 이하에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일 큰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이웃 사랑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그 이웃이 누구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 등장하는 인물이 사마리아인인데 그를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사람이고 이 사마리아 사람의 한 행위가 선한 행위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것이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크고 소중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날 때부터 장님으로 태어나서 앞을 보지 못하거나 살다가 다쳐서 불구의 몸으로 불치병을 앓고 사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십계명에 나와 있는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이미 다 지키고 있는데 아직 무엇이 더 부족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면서 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을만한 선한 행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그것을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두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다 팔아서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시면서 사십니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우리 살길도 바쁘고 남을 도울 돈도 시간도 여유도 없어서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오히려 누가 나 안도와 주나 살피면서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 가지고 좀 도와주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먹어보지만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어야지요,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 한 사람 조금 도와준다고 해도 표도 안 나고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도 못합니다.
가끔은 아주 작은 것 조금 나누어 주고 아주 작은 봉사 좀 하고 나는 선한 일을 했다. 라고 해 보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일에 비하면 우리는 선하지 못합니다.
악한 일을 더 많이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앞의 청년 이야기가 기록된 누가복음에서는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는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두 사건은 사실 우리에게 그런 선한 삶을 살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선한 삶을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 선하심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가 보려고 몸부림을 쳐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최선의 일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가장 선한 일입니다.
이 믿음 속에는 이웃을 도와주고 이웃을 위해서 재산을 다 팔아서 선을 행함으로도 받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기 때입니다.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행하고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데 이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별 볼일이 없는 작은 선 밖에 행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선행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돌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 기도에 기를 기울이고 계시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해하려고 하겠습니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즉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그 선을 행함으로 손해도 보고 어려움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날까지 사탄의 방해를 받거나 이 좋은 하나님나라를 빼앗기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2.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본문 14절 말씀 중에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의”란 무엇일까요?
법을 바르게 지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됩니다.
즉 의로운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거나, 성경을 많이 읽거나,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려고 하거나, 세상을 멀리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수백 독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성경 쓰기를 수십 번씩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을 새벽기도 한번 안 빠지고 참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40일 금식을 몇 번 씩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가지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다가는 잘못하면 오히려 교만의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런 행동으로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알고 지키는 것을 우리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을 우리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런 행위를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절망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줄을 압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하나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미리 아시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말고 새로운 의의 기준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주 쉽고 간단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나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시인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직도 이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 사실이 깨달아 질 때까지 성경을 읽으셔야 하고 그 사실이 깨달아질 때까지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기도나 금식이나 성경을 읽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컷 성경공부하고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성경 공부를 잘 못한 것입니다.
실컷 기도하고 남의 잘못만 보이고 자기의 죄가 깨달아지지 않는 사람은 아직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자랑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신앙의 입문도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를 알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는 의를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수 있지만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런 의로움들이 이 이신칭의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율법주의로 돌아갈까 봐 이 의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당시의 사람들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런 믿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3-38)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생활은 참 연약합니다.
얼마나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하기가 쉽습니까?
누가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을 합니까? 잡아 갑니까? 목숨을 위협하고 죽이려고 합니까?
교회에 오면 목사님들이 참 잘해주고 정말로 하나님나라 왕자처럼 모시고 살고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좋게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잘 안 나오고 신앙생활 잘 안합니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고 전혀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 지키는 직장을 구하려고 신앙 양심에 벗어나지 않는 사업을 하려고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 즉, 믿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로 복을 받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의로움 이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것을 주는지를 바르게 안다면 어떤 희생을 치른다고 할지라도 어떤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목숨까지 잃는다고 해도 이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즉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는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오늘 본문 14절 하반절 말씀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상으로 여러 가지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번역처럼 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어떻게 번역을 하든지 뜻은 비슷하고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 또 의를 위해서 살면서 그것을 반대하고 핍박하고 비웃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바라볼 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이 선함과 의로움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해서 병을 낫게 하고 기도해서 성공을 하고 기도해서 돈을 많이 벌고 기도해서 이 세상의 축복을 받고... 이런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천국으로 향해서 가고 있는 우리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잘 살아야지 있을지도 모르는 천국에 간다고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비웃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요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을 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런 두려움을 갖지 마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잘 사는 것 같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생의 허무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런 두려움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살고 영원히 사는 참된 생명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여 년 전에 미국 L. A.근교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지진 이후에 100여명의 사람들이 그냥 원인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로버트 클로너라는 의사가 원인을 조사했는데 이 사람들은 두려움이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공포는 심장을 멎게 한다고 합니다.
두뇌가 공포를 느끼면 화학물질이 생성되는데 이것은 독약과도 같아서 심장을 꽉 쥐고 풀어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공포 없이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을 살펴보시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해함도 상함도 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의를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두려움 없이 걱정 근심 없이 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전 3:13-14
제목 :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또”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라는 말보다 ”그렇다면“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앞 절의 말씀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신 대로 바로 앞 12절에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를 살펴보시고 보호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은 즉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말씀은 이 말씀을 전제로 그러므로, 그렇다면 열심히 선을 행하여야 하고 핍박을 받더라도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모든 성도님들이 선을 행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 핍박을 당하더라도 의를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해를 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1.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해하리요.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 사람하면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절 이하에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일 큰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이웃 사랑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그 이웃이 누구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 등장하는 인물이 사마리아인인데 그를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사람이고 이 사마리아 사람의 한 행위가 선한 행위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것이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크고 소중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날 때부터 장님으로 태어나서 앞을 보지 못하거나 살다가 다쳐서 불구의 몸으로 불치병을 앓고 사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십계명에 나와 있는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이미 다 지키고 있는데 아직 무엇이 더 부족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면서 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을만한 선한 행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그것을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두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다 팔아서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시면서 사십니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우리 살길도 바쁘고 남을 도울 돈도 시간도 여유도 없어서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오히려 누가 나 안도와 주나 살피면서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 가지고 좀 도와주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먹어보지만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어야지요,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 한 사람 조금 도와준다고 해도 표도 안 나고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도 못합니다.
가끔은 아주 작은 것 조금 나누어 주고 아주 작은 봉사 좀 하고 나는 선한 일을 했다. 라고 해 보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일에 비하면 우리는 선하지 못합니다.
악한 일을 더 많이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앞의 청년 이야기가 기록된 누가복음에서는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는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두 사건은 사실 우리에게 그런 선한 삶을 살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선한 삶을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 선하심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가 보려고 몸부림을 쳐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최선의 일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가장 선한 일입니다.
이 믿음 속에는 이웃을 도와주고 이웃을 위해서 재산을 다 팔아서 선을 행함으로도 받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기 때입니다.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행하고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데 이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별 볼일이 없는 작은 선 밖에 행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선행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돌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 기도에 기를 기울이고 계시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해하려고 하겠습니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즉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그 선을 행함으로 손해도 보고 어려움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날까지 사탄의 방해를 받거나 이 좋은 하나님나라를 빼앗기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2.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본문 14절 말씀 중에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의”란 무엇일까요?
법을 바르게 지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됩니다.
즉 의로운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거나, 성경을 많이 읽거나,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려고 하거나, 세상을 멀리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수백 독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성경 쓰기를 수십 번씩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을 새벽기도 한번 안 빠지고 참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40일 금식을 몇 번 씩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가지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다가는 잘못하면 오히려 교만의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런 행동으로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알고 지키는 것을 우리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을 우리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런 행위를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절망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줄을 압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하나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미리 아시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말고 새로운 의의 기준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주 쉽고 간단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나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시인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직도 이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 사실이 깨달아 질 때까지 성경을 읽으셔야 하고 그 사실이 깨달아질 때까지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기도나 금식이나 성경을 읽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컷 성경공부하고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성경 공부를 잘 못한 것입니다.
실컷 기도하고 남의 잘못만 보이고 자기의 죄가 깨달아지지 않는 사람은 아직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자랑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신앙의 입문도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를 알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는 의를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수 있지만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런 의로움들이 이 이신칭의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율법주의로 돌아갈까 봐 이 의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당시의 사람들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런 믿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3-38)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생활은 참 연약합니다.
얼마나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하기가 쉽습니까?
누가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을 합니까? 잡아 갑니까? 목숨을 위협하고 죽이려고 합니까?
교회에 오면 목사님들이 참 잘해주고 정말로 하나님나라 왕자처럼 모시고 살고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좋게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잘 안 나오고 신앙생활 잘 안합니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고 전혀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 지키는 직장을 구하려고 신앙 양심에 벗어나지 않는 사업을 하려고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 즉, 믿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로 복을 받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의로움 이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것을 주는지를 바르게 안다면 어떤 희생을 치른다고 할지라도 어떤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목숨까지 잃는다고 해도 이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즉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는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오늘 본문 14절 하반절 말씀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상으로 여러 가지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번역처럼 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어떻게 번역을 하든지 뜻은 비슷하고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 또 의를 위해서 살면서 그것을 반대하고 핍박하고 비웃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바라볼 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이 선함과 의로움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해서 병을 낫게 하고 기도해서 성공을 하고 기도해서 돈을 많이 벌고 기도해서 이 세상의 축복을 받고... 이런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천국으로 향해서 가고 있는 우리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잘 살아야지 있을지도 모르는 천국에 간다고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비웃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요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을 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런 두려움을 갖지 마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잘 사는 것 같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생의 허무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런 두려움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살고 영원히 사는 참된 생명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여 년 전에 미국 L. A.근교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지진 이후에 100여명의 사람들이 그냥 원인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로버트 클로너라는 의사가 원인을 조사했는데 이 사람들은 두려움이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공포는 심장을 멎게 한다고 합니다.
두뇌가 공포를 느끼면 화학물질이 생성되는데 이것은 독약과도 같아서 심장을 꽉 쥐고 풀어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공포 없이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을 살펴보시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해함도 상함도 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의를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두려움 없이 걱정 근심 없이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