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39)
본문 : 막 10:17-22
제목 :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제가 최근에 서울에 있는 유명한 병원 건강검진센터에서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종합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친척 권사님이 10년 전에도 한번 보내 주시더니 이번에 또 건강검진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10년 전에는 별걱정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검진을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약한 한 달 전부터 검진을 받고 결과를 받는 날까지 걱정되어서 좀 괴로웠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건강에 자신이 없고 혹시 큰 병에라도 걸려 있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결과가 나왔는데 크게 이상은 없고 좀 더 쓸만하다고 하니까 마음이 놓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고 합니다. 더 젊었을 때 건강을 잘 챙기시고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평생 큰 병 없이 큰 사고 없이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가 길면 백여 년 살다가 가는 이 세상 육신의 건강도 이렇게 점검도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서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인 영혼의 건강은 더 자주 점검하고 더 건강해지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이 잘못되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원한 세상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삶에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던 한 젊은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단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 청년은 육신적인 삶은 성공했지만, 영적인 삶은 실패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병이 너무 심해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왜 이 청년이 당당하게 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 설교 목적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 17~18절에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셨을 때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묻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1) 이 사람은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냥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뒤에 가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람을 재물이 많은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을 부자이면서 “관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관리란 유대교의 지도자나 권력자를 말합니다.
정리해 보면 이 사람은 아직 젊은 청년이면서 유대교의 지도자급에 있는 권력자이고 재물이 엄청 많은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이 남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서 돈도 있고 권력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는 최고의 호칭을 하면서 그 예수님 앞에 꿇어앉아서 말씀을 드리는 것을 보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세상의 일에만 욕심내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알고자 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알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것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2)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선 그 사람의 질문이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것에 대해서 그 호칭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중점적으로 행하신 일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선한 선생님” 정도로 알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든지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러야지 어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인데 사람에게서 찾느냐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잘못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선물로 하나님께 거저 받는 것인데 이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본문 19~20절 말씀에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한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인간관계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계명들만 다 지켜도 의로운 사람이 될 수는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이런 길을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길이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있지만 사실은 그 길은 누구도 갈 수 없는 불가능한 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욕을 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해하여야 살인죄가 아니라 미워하고 욕을 하는 것까지 다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뜻입니다.
실제로 간음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까지도 간음죄에 해당합니다. 도둑질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남이 가져야 할 것을 욕심으로 자신만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도둑질하는 죄에 해당합니다.
이 부자 청년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자신을 평가했습니다. 그 계명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 가지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율법을 어기고 있으면서도 다 지켰다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본문 21절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을 보시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음을 평가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시면 아주 건방지다고 야단을 치셨을 것 같은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뭘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그 청년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이며 오히려 율법의 정신과 반대되는 일을 행하였음을 깨닫고 회개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율법을 잘 지켜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젊은 나이에 재물이 많은 부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부자는 자기의 권력이나 머리를 이용해서 남이 가져야 할 것을 빼앗고 혼자 차지하려고 할 때 부자가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부자가 있으면 한번 살펴보십시오. 남에게 나누어주고 남이 잘되게 해주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는 하겠지만 재물이 많은 부자는 되지 못합니다. 남에게도 못 주고 자신도 아까워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재물을 모아서 부자가 됩니다.
율법을 다 지켰다고 주장하는 젊은 부자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신 것은 이것 하나만 보아도 네가 하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나누어줄 줄 모르고 부자가 된 것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너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배우게 될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강해할 때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고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거짓교회인가를 구별하는 방법은 교회에서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가 복음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의 질문처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고 종교단체일 뿐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영생을 얻을 것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영생을 얻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가 시작될 때부터 교회 안의 가장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누구의 주장을 따르는가 하는 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한다면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중세시대의 타락한 천주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논쟁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짓 교리를 내세워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이런 엉터리 주장에 칼빈이나 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로마서를 비롯한 서신서들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오늘날 우리가 다니고 있는 개혁주의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교회가 다시 유대교나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엉터리 교리를 따라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윤리 도덕을 구원의 조건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죄인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께서 나의 흉악한 죄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인정하고 믿으면 되는데 인간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옛날에 못살 때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고 십자가의 복음 천국 복음이 정말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살만하니까 교만하여지기 시작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윤리 도덕을 가르쳐서 똑바른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에 인천의 역사를 연구하는 초교파 단체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 단체의 회장이라고 하는 감리교 감독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대회사를 했는데 아주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여기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알베르트 슈바이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 열차를 타고 갔는데 특실도 아니고 3등 칸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열차에 4등 칸이 없어서 3등 열차에 탔다고 하는 말에 아주 감동을 받은 듯이 훌륭한 슈바이처 이야기하고 내려갔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그것도 감독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그렇게 할 말이 없어서 그 중요한 자리에 슈바이처 이야기나 하고 내려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화가 났습니다.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한 사람이라면 입만 벌리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복음을 말한 만도 한데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내려가는 것을 보고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슈바이처는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보다 더 엄청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머리가 어떻게나 좋든지 의사이면서 음악가이면서 철학자이고 신학자이고 루터교 목사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아프리카 밀림에 들어가서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병원을 세워서 많은 사람에게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그런 공로로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노벨상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부자 청년처럼 자신의 이익은 다 챙긴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후원금을 받았고, 온갖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수많은 표창장 감사장과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에는 이름 없이 봉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누렸습니다. 희생하고 봉사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 사람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같이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슈바이처와 같은 사람의 주장으로 인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선한 일을 했지만 교회로 보면 교회를 변질시키는 악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이 들어와서 많은 교회에 복음을 믿는 믿음이 사라지고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나 성도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윤리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윤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는 죄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는 곳입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본문 22절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진짜 영생의 길을 알려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먼저 선결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가진 재산이 얼마 안 되면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재산을 소유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그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영원한 생명이라도 이 재산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엄청나게 배운 것이 많은 사람, 출세해서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 세상에서 선한 일 좋은 일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은 그 좋은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슈바이처처럼 자기 의를 내세워서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참 쉽습니다. 평생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하는 일도 잘 안 되고 부자도 못되고 몸이 아프고 죽어가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가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에 가장 큰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쉽게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전 재산을 바치라면 다 바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가진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데 작은 것 희생하고 엄청난 것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복된 소식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가는 그런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뻐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우시면 최후의 그 날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예수남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고 슬퍼 울며 가슴을 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기뻐 뛰며 즐거워할 그 날을 생각하면서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청년이 그 많은 재산 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부자가 되고 권력자로 살고 온갖 칭찬을 받으면서 잘난 척하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작은 의로움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일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고 살다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형벌의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근심 정도가 아니라 슬피 울며 가슴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출세나 재산이나 의로운 행위는 비록 부족했으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늘 가슴에 새기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