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1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29)
본문 : 벧전 3:1-2
제목 :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오늘 설교 제목이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입니다.
설교제목만 들으시면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런 설교제목을 잡으셨을까?
이런 설교제목을 잡으신 목사님은 시대에 뒤떨어진 좀 고리타분한 목사님이다. 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제목을 잡을 때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지만 전들 어떻게 합니까? 강해설교를 하고 있을 뿐이고, 순서에 따라 오늘 본문을 설교할 차례일 뿐이고,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가 이 말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경말씀대로 제목을 잡았습니다.
저도 세상 돌아가는 것 잘 압니다.
요즘 아내들 위치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잘 압니다.
요즘 젊은 남편들 세상 살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도 잘 압니다.
1,2십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가정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요즘 같으면 차라리 제목을 바꿔서 “남편들이여 아내에게 순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가정이 평안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은 사람의 숫자에도 들지 못했는데 그동안 여자들의 인권이 많이 상승을 했고 이제 곧 역전을 할 때가 된 것이 아니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서 서로 차이가 없는 동등한 사람이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서로 주도권 싸움을 시작한 것은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부터였습니다.
성경을 유심히 살피면서 읽는 사람은 창세기 3:16절의 말씀에 부부간의 주도권 싸움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창세기 3:16절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하와에 벌을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임신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 대목만 강조가 되고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그냥 넘어갑니다.
그냥 넘어가기 쉬운 이 말씀 속에 부부간의 갈등이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원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는 것(개역한글)이 부부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이 지금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는 그런 긍정적인 대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내 된 하와에게 벌을 주시는 대목이기 때문에 그냥 행복하게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불행하게 하는 저주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에는 “그냥 너는 남편을 원하고“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어를 더 잘 살펴보고 알기 쉽게 번역을 한 ”우리말 성경“은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나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때 부터 부부간의 갈등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지요.
그냥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위해주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살면 될 텐데 여자는 여자 나름대로 남편을 지배하면서 살려고 하고 남편은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아내를 다스리려고 하니까 그 좋은 부부간에 이렇게 갈등과 싸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게 하셨지만 하나님을 떠나고 죄를 범하고 타락한 이후에는 서로 지배하려고 하고 서로 싸우는 험악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타락한 이후에는 이렇게 우리 인생이 늙고 병들어서 죽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관계 인간과 인간관계도 부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공격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소유한 새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었지만 그 새 생명이 그 새로운 삶이 언제 시작이 되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타락함으로 받았던 죄의 형벌들을 다 사함을 받았는데 그 효력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과거에 우리가 죄를 범하였던 그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다시 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구원해 주셨지만 그 구원의 완성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영원한 세상에서 시작이 되도록 해 주셨고 이 세상에서는 그 일부만 누리게 하셨고 더러는 제한 하셔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오히려 더 고난을 받게 하기도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우리가 남자나 여자나 남편이나 아내나 다 같은 사람인데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라고 하면 될 텐데 그렇기 말하지 않고 순종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과거에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남자가 주인노릇하고 여자가 종노릇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질서를 바로잡고 서로 동등하게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내들에게 순종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행인이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바꾸려고 세상을 뒤엎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순응하면서 살다가 얼른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내 소중한 줄 모르고 종처럼 부려먹으려고 하는 못된 남편들을 다 몰아내고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을 만들어서 평화로운 세상 여자가 대우받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 라고 하면서 여성운동을 벌리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살다가 얼른 천국에 오라고 하시는 것이요 그렇게 사는 것이 더 뜻 깊은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아내의 순종이 남편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거나 이 세상의 삶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이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남편이 말 잘 안 듣고 대우 잘 안 해주면 보따리 싸서 도망가지 그렇게 쩔쩔매면서 살지 말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은 우리가 가서 살게 될 영원한 천국의 삶에 비하면 하룻밤 꿈과 같고 아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좀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든지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인생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와 가장 가까운 남편이 아내가 그 절망 가운데서 벗어나서 이 소망의 나라로 오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서신이 기록된 당시의 교회에는 대부분 종들이 많았고 또 대부분 여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도 교회에 남자보다도 여자가 많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더 여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여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남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한 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아주 특별한 관계인 부부가 같이 예수님을 믿고 같이 천국가지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기야 부부가 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원수로 살고 지옥이라도 남편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부부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부부들의 이야기이고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야하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좀 힘들어도 남편에게 순종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해서 남편을 변화시키려는 것 보다는 남편에게 순종을 하고 더 사랑해 주는 것이 쉽게 전도를 하는 길입니다.
본문 말씀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셨는데 여기 ”이와 같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 2장 13절 이하에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 즉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총독에게 하라”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아내들도 인간의 제도를 따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로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18절에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러하라”라고 하신 것처럼 선하고 관용하는 좋은 남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라 못되고 까다로운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21절 말씀 이하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가 다 나름대로 연관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잠깐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인간의 제도들을 고치려고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그냥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제도를 따라 왕이나 총독이나 남편에게 순종을 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관용하고 선을 행하는 남편에게만 순종을 할 것이 아니라 악하고 까다로운 남편에게도 순종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희생하시고 헌신하신 것처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남편을 다스리면서 살려고 하는 것 보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정에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잘 이끌고 나가는 남편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남편들은 여러 가지로 미운 행동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남편에게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의 순종을 통해서 믿지 않던 남편이 구원을 얻고 힘을 잃은 남편들이 힘 있게 살게 될 것입니다.
2.백 마디 말보다 온전한 행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에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전도를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지 않는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이 그런 말을 잘 듣습니까?
남자들은 자존심 하나 가지고 삽니다. 자기가 남에게 설득을 당하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특별히 자기 아내라도 여자에게 설득을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 가지고 설득을 당할 남편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말다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단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생 생활에서도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말보다는 행동입니다.
요즘은 말만 잘해도 좋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어차피 남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내 것을 손해 보면서까지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라도 잘 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말은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됩니다.
말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말까지도 좋게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하고는 잘 지내는데 집에 들어와서 가족들과는 잘 못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참 잘하는데 왜 잘 해야 할 가족들에게는 잘 못하는 것일까요?
남들에게는 말만 잘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말만 잘해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삶을 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보는 사람은 말만 번지레하게 잘해도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모든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말만 잘했다가는 이중인격자 위선자로 보이기 때문에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의 삶은 언행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말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라고 하면서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사랑하는 사람 같지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론은 많고 말은 많은데 실천이 없고 삶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머리로만 하고 이론으로만 하고 실지로 그렇게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침에 뒷산에 산책을 가니까 할머니들이 모여서 운동을 합니다.
리더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맨손체조를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함께 하면서 운동을 합니다.
그 운동 중에 하나가 박수를 치면서 하 하 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웃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니까 억지로라도 웃음소리를 내는 모양입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좋다고 하니까 그렇게라도 웃는 것이 웃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 웃을 때 그 웃음이 우리 몸에 보약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이 적당히 운동을 해야 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운동보다 더 효과가 있는 것은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 속에 기쁨도 있고 건강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노동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쓸데없이 운동한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하고 일을 하는 것이 건강에 더 좋고 더 행복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신행의 일치가 참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신앙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사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천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사랑이 없고 왜 이렇게 부패한 나라가 되어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믿고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제로 삶은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이나 신앙생활이나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에서는 부부간에 있어서는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남편들은 아내의 신앙생활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려워한다는 말은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 본다는 말은 단순히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을 한다는 말입니다.
남편들은 아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 그런 마음으로 정결한 삶을 사는가를 옆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을 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교회에 갔다가 와서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가를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가 가진 신앙대로 그렇게 실천을 하고 살면 아 하나님이 계시는 모양이구나, 아 천국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집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괜히 재미로 교회에 다니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 과연 그 믿음대로 사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초창기와는 달리 전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성도들의 삶이 이론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고난과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하지만 삶은 호화로운 사람을 살고 말로는 천국을 이야기하지만 삶은 이 세상을 더 잘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말은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도와주어라고 하면서 삶은 자기들만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천국은 없구나, 자기 이익 챙기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더 이상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에서는 우리의 가족들이 남편이 아내가 자녀들이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가족이 신앙을 갖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우리 가족들을 전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과 행동이,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되는 그런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 벧전 3:1-2
제목 :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오늘 설교 제목이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입니다.
설교제목만 들으시면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런 설교제목을 잡으셨을까?
이런 설교제목을 잡으신 목사님은 시대에 뒤떨어진 좀 고리타분한 목사님이다. 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제목을 잡을 때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지만 전들 어떻게 합니까? 강해설교를 하고 있을 뿐이고, 순서에 따라 오늘 본문을 설교할 차례일 뿐이고,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가 이 말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경말씀대로 제목을 잡았습니다.
저도 세상 돌아가는 것 잘 압니다.
요즘 아내들 위치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잘 압니다.
요즘 젊은 남편들 세상 살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도 잘 압니다.
1,2십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가정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요즘 같으면 차라리 제목을 바꿔서 “남편들이여 아내에게 순종하라 그리하면 너희 가정이 평안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은 사람의 숫자에도 들지 못했는데 그동안 여자들의 인권이 많이 상승을 했고 이제 곧 역전을 할 때가 된 것이 아니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서 서로 차이가 없는 동등한 사람이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서로 주도권 싸움을 시작한 것은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부터였습니다.
성경을 유심히 살피면서 읽는 사람은 창세기 3:16절의 말씀에 부부간의 주도권 싸움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창세기 3:16절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하와에 벌을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임신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 대목만 강조가 되고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그냥 넘어갑니다.
그냥 넘어가기 쉬운 이 말씀 속에 부부간의 갈등이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원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는 것(개역한글)이 부부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이 지금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는 그런 긍정적인 대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내 된 하와에게 벌을 주시는 대목이기 때문에 그냥 행복하게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불행하게 하는 저주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에는 “그냥 너는 남편을 원하고“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어를 더 잘 살펴보고 알기 쉽게 번역을 한 ”우리말 성경“은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나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때 부터 부부간의 갈등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지요.
그냥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위해주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살면 될 텐데 여자는 여자 나름대로 남편을 지배하면서 살려고 하고 남편은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아내를 다스리려고 하니까 그 좋은 부부간에 이렇게 갈등과 싸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게 하셨지만 하나님을 떠나고 죄를 범하고 타락한 이후에는 서로 지배하려고 하고 서로 싸우는 험악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타락한 이후에는 이렇게 우리 인생이 늙고 병들어서 죽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관계 인간과 인간관계도 부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공격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소유한 새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었지만 그 새 생명이 그 새로운 삶이 언제 시작이 되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타락함으로 받았던 죄의 형벌들을 다 사함을 받았는데 그 효력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과거에 우리가 죄를 범하였던 그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다시 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구원해 주셨지만 그 구원의 완성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영원한 세상에서 시작이 되도록 해 주셨고 이 세상에서는 그 일부만 누리게 하셨고 더러는 제한 하셔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오히려 더 고난을 받게 하기도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우리가 남자나 여자나 남편이나 아내나 다 같은 사람인데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라고 하면 될 텐데 그렇기 말하지 않고 순종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과거에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남자가 주인노릇하고 여자가 종노릇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질서를 바로잡고 서로 동등하게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내들에게 순종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행인이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바꾸려고 세상을 뒤엎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순응하면서 살다가 얼른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내 소중한 줄 모르고 종처럼 부려먹으려고 하는 못된 남편들을 다 몰아내고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을 만들어서 평화로운 세상 여자가 대우받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 라고 하면서 여성운동을 벌리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살다가 얼른 천국에 오라고 하시는 것이요 그렇게 사는 것이 더 뜻 깊은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아내의 순종이 남편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거나 이 세상의 삶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이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남편이 말 잘 안 듣고 대우 잘 안 해주면 보따리 싸서 도망가지 그렇게 쩔쩔매면서 살지 말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은 우리가 가서 살게 될 영원한 천국의 삶에 비하면 하룻밤 꿈과 같고 아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좀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든지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인생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와 가장 가까운 남편이 아내가 그 절망 가운데서 벗어나서 이 소망의 나라로 오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서신이 기록된 당시의 교회에는 대부분 종들이 많았고 또 대부분 여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도 교회에 남자보다도 여자가 많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더 여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여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남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한 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아주 특별한 관계인 부부가 같이 예수님을 믿고 같이 천국가지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기야 부부가 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원수로 살고 지옥이라도 남편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부부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부부들의 이야기이고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야하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좀 힘들어도 남편에게 순종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해서 남편을 변화시키려는 것 보다는 남편에게 순종을 하고 더 사랑해 주는 것이 쉽게 전도를 하는 길입니다.
본문 말씀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셨는데 여기 ”이와 같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 2장 13절 이하에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 즉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총독에게 하라”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아내들도 인간의 제도를 따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로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18절에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러하라”라고 하신 것처럼 선하고 관용하는 좋은 남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라 못되고 까다로운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21절 말씀 이하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가 다 나름대로 연관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잠깐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인간의 제도들을 고치려고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그냥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제도를 따라 왕이나 총독이나 남편에게 순종을 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관용하고 선을 행하는 남편에게만 순종을 할 것이 아니라 악하고 까다로운 남편에게도 순종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희생하시고 헌신하신 것처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남편을 다스리면서 살려고 하는 것 보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정에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잘 이끌고 나가는 남편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남편들은 여러 가지로 미운 행동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남편에게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의 순종을 통해서 믿지 않던 남편이 구원을 얻고 힘을 잃은 남편들이 힘 있게 살게 될 것입니다.
2.백 마디 말보다 온전한 행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에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전도를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지 않는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이 그런 말을 잘 듣습니까?
남자들은 자존심 하나 가지고 삽니다. 자기가 남에게 설득을 당하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특별히 자기 아내라도 여자에게 설득을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 가지고 설득을 당할 남편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말다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단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생 생활에서도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말보다는 행동입니다.
요즘은 말만 잘해도 좋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어차피 남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내 것을 손해 보면서까지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라도 잘 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말은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됩니다.
말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말까지도 좋게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하고는 잘 지내는데 집에 들어와서 가족들과는 잘 못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참 잘하는데 왜 잘 해야 할 가족들에게는 잘 못하는 것일까요?
남들에게는 말만 잘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말만 잘해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삶을 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보는 사람은 말만 번지레하게 잘해도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모든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말만 잘했다가는 이중인격자 위선자로 보이기 때문에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의 삶은 언행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말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라고 하면서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사랑하는 사람 같지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론은 많고 말은 많은데 실천이 없고 삶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머리로만 하고 이론으로만 하고 실지로 그렇게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침에 뒷산에 산책을 가니까 할머니들이 모여서 운동을 합니다.
리더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맨손체조를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함께 하면서 운동을 합니다.
그 운동 중에 하나가 박수를 치면서 하 하 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웃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니까 억지로라도 웃음소리를 내는 모양입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좋다고 하니까 그렇게라도 웃는 것이 웃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 웃을 때 그 웃음이 우리 몸에 보약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이 적당히 운동을 해야 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운동보다 더 효과가 있는 것은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 속에 기쁨도 있고 건강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노동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쓸데없이 운동한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하고 일을 하는 것이 건강에 더 좋고 더 행복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신행의 일치가 참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신앙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사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천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사랑이 없고 왜 이렇게 부패한 나라가 되어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믿고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제로 삶은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이나 신앙생활이나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에서는 부부간에 있어서는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남편들은 아내의 신앙생활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려워한다는 말은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 본다는 말은 단순히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을 한다는 말입니다.
남편들은 아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가? 그런 마음으로 정결한 삶을 사는가를 옆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을 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교회에 갔다가 와서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가를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가 가진 신앙대로 그렇게 실천을 하고 살면 아 하나님이 계시는 모양이구나, 아 천국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집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괜히 재미로 교회에 다니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 과연 그 믿음대로 사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초창기와는 달리 전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성도들의 삶이 이론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고난과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하지만 삶은 호화로운 사람을 살고 말로는 천국을 이야기하지만 삶은 이 세상을 더 잘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말은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도와주어라고 하면서 삶은 자기들만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천국은 없구나, 자기 이익 챙기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더 이상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에서는 우리의 가족들이 남편이 아내가 자녀들이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가족이 신앙을 갖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우리 가족들을 전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과 행동이,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되는 그런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