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6.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 10)

  본문 : 막 2:18-22

  제목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주인이신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또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행하시고 가르치셨는가를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해서 특별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를 부르시고 잔칫집에 세리와 죄인들이 많은 것을 서기관들이 비웃자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죄 사함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 겸 질책을 합니다.

 

 아마 여기 사람들이란 앞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시비했던 서기관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시자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일개 인간이 그런 말을 하느냐고 질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죄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에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죄 문제를 심각하게 보는 사람이라면 죄를 회개하고 금식을 해야 하는데 죄 문제의 중심이 되는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비유로 대답하시기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본문 18-20절에 “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1) 구약시대의 금식

 구약의 율법에서는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금식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이 대속죄일에만 금식을 했는데 그 후에 특별한 절기에도 금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금식은 주로 자신이나 민족의 죄를 회개할 때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한 금식이 그런 죄의 각성과 상관없는 금식으로 변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를 위한 금식이 오히려 금식을 하면서 다투고 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58:6)라고 하셨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금식

 구약시대 때 일 년에 한 번 혹은 네 번 정도 하던 금식을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매주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 금식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일 년에 네 번 정도 하던 금식이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하도록 바뀌었는지 잘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건이 참된 경건이 아니라 겉치장을 강조하는 경건이었습니다. 속으로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겉보기에는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함으로써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요한을 말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금식이 어떠한 성격의 금식인지는 잘 모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전통에 의해서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을 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가식적인 금식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요한을 생각하며 하는 금식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헤롯왕이 자기 제수와 결혼한 부도덕을 지적하다가 잡혀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용감히 나선 스승을 생각하면서 이런 죄악이 없어지기를 위한 금식이었을 것입니다. 스승이 무사하게 풀려나고 계속해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해서 죄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일에 쓰임 받기를 응원하는 금식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시대나 바리새인이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이 다 죄와 관련한 금식이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죄짓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을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이 그 뜻입니다. 죄를 사한다고 하면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면서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금식

 그런 서기관들의 지적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금식하지 않는 이유와 앞으로 금식하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금식하지 않는 이유는 마치 혼인 잔칫집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같이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의 지적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지금까지의 방법들과 다릅니다.

 

 구약시대의 죄 문제의 해결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똑바로 살려고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 스스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이 한번 마음 고쳐먹고 똑바로 살겠다고 다짐하면 그런 마음이 계속 유지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조석지변(朝夕之變)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먹은 마음과 저녁에 먹은 마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고 시작해도 그 마음이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1년에 한 번씩 금식하다가 네 번으로 바꿨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자주 해야 죄지을 마음이 없어지고 죄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면 뭐합니까? 겉으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처럼 자주 금식을 하지만 그렇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위선이나 거짓 경건이 더 죄를 크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다른 방법 완전한 방법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아무리 다짐을 해도 또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하여 아예 그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은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엄청난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새로운 방법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잔칫집과 같은 시간입니다. 금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금식하면서 죄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즐겁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주실 그 구원의 길을 따르면 됩니다.

 

 다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나라로 먼저 떠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죄 문제 때문에 금식할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게 해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금식하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본문 2122절에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실 금식을 해야 되느냐, 안 해도 되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과 신약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낡은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의 언약을 말씀한다면 생베 조각이나 새 포도주는 신약의 언약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지만 시대에 따라서 적용하는 것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주신 새 언약은 구약의 언약과는 전혀 다른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따라가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많이 혼란스러운 것은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화시켜야 하는가일 것입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다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서 신구약 성경의 차이점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고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 “구약은 영적 축복을 현세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구약이나 신약은 모두가 우리의 본향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고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구약에서는 이 세상의 나라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시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나라는 그것 자체가 최종적인 축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에 세워진 이스라엘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가나안 땅에 세운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나라인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되고 외국 땅에서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즐긴 지상에서의 축복을 거울삼아 자신들을 위해서 준비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이 세상에서의 육신적인 복만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 생활을 더 열심히 하고 교회를 위해서 더 충성할 때 이 땅에서의 복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그 복 자체만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축복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2) “구약시대에는 형상과 의식으로 진상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예표 했다.”

 신약시대는 진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실제적인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는 그 예수님께서 아직 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떤 형상이나 의식을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절기들이나 제사나 특별한 일들은 그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제사 제도는 죄와 관련이 있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전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지만 성전의 기물 하나하나가 다 예수님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것도 구약의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정하고 부활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감사하고 죄 사함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만 갈 수 있는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된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런 예배의 의미를 알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3) “구약은 문자적이요 신약은 영적이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대조하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문자적인 교훈이고 복음은 영적인 교훈입니다. 율법은 돌판에 새겼고 복음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율법은 죽음을 의미하고 복음은 생명을 전파합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복음은 죄 사함을 전파합니다. 율법은 효력을 잃게 되고 복음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4) “구약은 노예 상태이며 신약은 자유이다.”

 구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키기 때문에 성경은 구약을 종살이의 언약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죄 사함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하므로 자유의 언약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14-1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율법의 노예처럼 율법을 지키느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5) “구약은 한 민족에, 신약은 모든 민족에게 관계한다.”

 구약시대 때는 이스라엘 한 민족만 하나님 나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실 때에는 모든 민족 중에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이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우상을 숭배하던 나라였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믿음이 구약성경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새롭게 신약의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구약은 낡은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우리는 생베 조각이며 새 포도주와 같은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금식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새 포도주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따라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복이 아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사모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