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25)
본문 : 벧전 2:21
제목 :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죽을 사람을 살리시기도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하심이고 또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셔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을 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아주 명쾌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이런 믿음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과 이 교회를 통하여 천국의 문을 여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다 목격한 제자들은 야 이제는 됐다, 이제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이 됐다, 이제는 살만한 세상이 열리겠다, 이분이 우리의 왕이 되시면 우리나라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아주 희망에 부풀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이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용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하면서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이전의 모습을 좋아하고 고난당하시기 이전의 그 기적적인 일들을 사모하면서 따르는 사람들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어달라고 하던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마치 그 때의 베드로처럼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고난을 당하실수도 없고 고난당할 필요도 없으십니다. 그냥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왕국을 만들어갑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후일 베드로는 그 때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 박해가 심한 로마로 다시 들어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알게 된 베드로가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렇게 성도가 된 것은 이를 위하여 즉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본을 끼쳐 우리도 그 자취를 따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잘 생각해 보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오늘 본문 말씀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를 위하여“는 지난 주일에 우리가 배운 바로 앞 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19, 20절에 있는 고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때로는 부당하게 억울하게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여 참으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런 고난을 당하는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목사님들 설교를 들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형통하고 잘되고 복을 받아서 잘산다고 하는데 왜 목사님은 좋은 설교 복 받는 설교 다 놔두고 하필 날마다 이런 설교만 하느냐고 이상하게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제가 일부러 이런 본문 찾아다니면서 설교하는 것 아니잖습니까?
강해설교를 하다가 보니까 오늘 본문을 설교하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저도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지 일부러 없는 말을 꾸며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 병이나 고쳐주시고 죽을 사람이나 살려주시고 밥이나 배부르게 먹게 해주세요.
나중에 천국이니 영생이니 그런 말 보다는 우선 지금 잘 살게 해 주세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이 윤택하게 해 주세요
고생은 너무나 지긋지긋하게 해 와서 이제는 싫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은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못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밥만 굶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을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런 시절에 부자 되게 해 준다 성공하게 해 준다 병을 고쳐준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지금도 부자 되게 해 준다는 교회 성공하게 해 준다는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치병 고쳐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밑져야 본전이니까 교회로 기도원으로 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교회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름을 받았으니”라고 하면 좋다고 하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너희가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너희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너희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특별히 불렀다고 해도 그 말을 믿지 못해서 따르지 않을 것인데 고난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부른다고 하면 과연 그 부름에 응답을 하고 따라 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고난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고난 후에 오는 그 영광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한 후에 그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이런 영광이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한 후에 오는 그 화려한 영광의 면류관이 없다고 한다면 쓸데없이 고생만 해야 된다면 무엇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을 당한 후에 그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천국에 관해서만 이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곳에 이런 법칙이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노력을 하고 애를 쓰고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하고 헌신을 할 때 그 후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생 없이 희생 없이 헌신 없이 그냥 공짜로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헌신을 통해 나는 힘 안들이고 고생하지 않고 거저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놀고먹으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우리 형님세대가 새벽부터 늦게까지 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이런 노래를 부르며 새벽부터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든지 교회이든지 어느 단체이든지 어느 가정이든지 거기에 희생하는 사람이 없으면 헌신하는 사람이 없으면 잘 되지가 않습니다.
희생과 고난과 헌신이 있을 때 그로인해서 서로가 행복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희생 없이, 헌신 없이, 노력 없이, 고생 없이 놀고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는 망해가는 사회입니다.
서로 먼저 헌신하고, 희생하고, 솔선수범하여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은 행복을 향하여 가는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산다고 해도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천국의 영광은 이 세상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었으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고통 나의 괴로움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괴롬 통하여 천국 보이고...”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그래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영광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져 주셨기 때문에 우리 같은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이 영광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고통이 없다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고통이 없다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고난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흘린 땀, 우리가 흘린 눈물이 우리에게 엄청난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2.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오늘 본문 말씀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라고 했습니다.
사실 앞에서 인용한 19절 20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한 말씀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시면서 참으신 대표적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참으로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일이 어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지으신 일이 있습니까?
그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첩자를 보내서 여러 가지의 말로 시험을 해 봤지만 한 번도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서 약점을 보이시거나 실수를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사탄이 직접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을 해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으셨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습니다.
로마총독 빌라도가 아무리 조사를 해 보아도 예수님께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로우신 분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들이나 달리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또 선을 행하시다가 고난을 당하신 대표적인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도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은 죄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이런 선한 일을 하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박수는 치지 못할망정 영광은 돌리지 못할망정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렇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시면 서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그 모진 고난을 다 참으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심으로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그 선한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 줄 아셨기 때문에 참으셨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참으심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자신을 희생하면서 헌신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 보신 일은 있으십니까?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그것으로 주님을 섬겨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신 것입니다.
만약에 아직 그런 일이 없으셨다면 이 시간에 한번 결심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3.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 고난당하기를 자처하신 것은 물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목적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본을 받아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만 받아 누리려는 사람이 있고 한 종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만 받아 누려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불쌍한 인생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서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도 모르고 세상을 아무렇게나 사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타고 없어질 이 세상의 재물 좀 있다고 떵떵거리면서 교만하게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공부 좀 했다고 세상의 이치를 좀 안다고 과학이 어떻다느니 철학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는 철딱서니 없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자녀들 공부 너무 많이 시키지 마세요.
소위 인류대학이라고 하는데 못 보내서 안달나지 마세요.
공부 좀 많이 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출세를 하면 교회에 잘 안 다닐 확률 100%입니다.
바른 물질관을 가지지 못했으면 돈 벌려고 애쓰지 마세요.
떼돈을 번다면 타락할 확률 100%입니다.
부자가 되면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확률 100%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도 많은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것을 받아서 누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만 받아서 누린다고 해서 미워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많이 받아서 마음껏 누리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만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좋은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모진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렇게만 살아도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고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 고난을 마다하고 영광만 받으면서 살겠습니까?
저는 한국교회의 일부 타락한 목사들을 보면서 정말로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천국을 믿는 사람들인지 의심이 갑니다.
예수님 팔아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면서 막상 예수님을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의 길을 따라오려고 하지 않고 영광의 길로만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도 고난의 길을 가기를 싫어합니다.
축복이나 받으려고 하고 출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이나 하려고 하지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일이나 본을 받으려고 하지 이렇게 고난을 받으신 것은 본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스스로 자처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본을 보이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전 2:21
제목 :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죽을 사람을 살리시기도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하심이고 또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셔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을 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아주 명쾌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이런 믿음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과 이 교회를 통하여 천국의 문을 여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다 목격한 제자들은 야 이제는 됐다, 이제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이 됐다, 이제는 살만한 세상이 열리겠다, 이분이 우리의 왕이 되시면 우리나라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아주 희망에 부풀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이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용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하면서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이전의 모습을 좋아하고 고난당하시기 이전의 그 기적적인 일들을 사모하면서 따르는 사람들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어달라고 하던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마치 그 때의 베드로처럼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고난을 당하실수도 없고 고난당할 필요도 없으십니다. 그냥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왕국을 만들어갑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후일 베드로는 그 때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 박해가 심한 로마로 다시 들어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알게 된 베드로가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렇게 성도가 된 것은 이를 위하여 즉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본을 끼쳐 우리도 그 자취를 따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잘 생각해 보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오늘 본문 말씀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를 위하여“는 지난 주일에 우리가 배운 바로 앞 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19, 20절에 있는 고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때로는 부당하게 억울하게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여 참으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런 고난을 당하는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목사님들 설교를 들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형통하고 잘되고 복을 받아서 잘산다고 하는데 왜 목사님은 좋은 설교 복 받는 설교 다 놔두고 하필 날마다 이런 설교만 하느냐고 이상하게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제가 일부러 이런 본문 찾아다니면서 설교하는 것 아니잖습니까?
강해설교를 하다가 보니까 오늘 본문을 설교하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저도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지 일부러 없는 말을 꾸며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 병이나 고쳐주시고 죽을 사람이나 살려주시고 밥이나 배부르게 먹게 해주세요.
나중에 천국이니 영생이니 그런 말 보다는 우선 지금 잘 살게 해 주세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이 윤택하게 해 주세요
고생은 너무나 지긋지긋하게 해 와서 이제는 싫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은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못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밥만 굶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을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런 시절에 부자 되게 해 준다 성공하게 해 준다 병을 고쳐준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지금도 부자 되게 해 준다는 교회 성공하게 해 준다는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치병 고쳐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밑져야 본전이니까 교회로 기도원으로 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교회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름을 받았으니”라고 하면 좋다고 하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너희가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너희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너희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특별히 불렀다고 해도 그 말을 믿지 못해서 따르지 않을 것인데 고난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부른다고 하면 과연 그 부름에 응답을 하고 따라 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고난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고난 후에 오는 그 영광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한 후에 그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이런 영광이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한 후에 오는 그 화려한 영광의 면류관이 없다고 한다면 쓸데없이 고생만 해야 된다면 무엇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을 당한 후에 그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천국에 관해서만 이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곳에 이런 법칙이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노력을 하고 애를 쓰고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하고 헌신을 할 때 그 후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생 없이 희생 없이 헌신 없이 그냥 공짜로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헌신을 통해 나는 힘 안들이고 고생하지 않고 거저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놀고먹으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우리 형님세대가 새벽부터 늦게까지 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이런 노래를 부르며 새벽부터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든지 교회이든지 어느 단체이든지 어느 가정이든지 거기에 희생하는 사람이 없으면 헌신하는 사람이 없으면 잘 되지가 않습니다.
희생과 고난과 헌신이 있을 때 그로인해서 서로가 행복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희생 없이, 헌신 없이, 노력 없이, 고생 없이 놀고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는 망해가는 사회입니다.
서로 먼저 헌신하고, 희생하고, 솔선수범하여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은 행복을 향하여 가는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산다고 해도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천국의 영광은 이 세상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었으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고통 나의 괴로움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괴롬 통하여 천국 보이고...”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그래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영광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져 주셨기 때문에 우리 같은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이 영광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고통이 없다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고통이 없다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고난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흘린 땀, 우리가 흘린 눈물이 우리에게 엄청난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2.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오늘 본문 말씀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라고 했습니다.
사실 앞에서 인용한 19절 20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한 말씀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시면서 참으신 대표적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참으로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일이 어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지으신 일이 있습니까?
그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첩자를 보내서 여러 가지의 말로 시험을 해 봤지만 한 번도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서 약점을 보이시거나 실수를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사탄이 직접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을 해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으셨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습니다.
로마총독 빌라도가 아무리 조사를 해 보아도 예수님께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로우신 분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들이나 달리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또 선을 행하시다가 고난을 당하신 대표적인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도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은 죄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이런 선한 일을 하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박수는 치지 못할망정 영광은 돌리지 못할망정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렇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시면 서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그 모진 고난을 다 참으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심으로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그 선한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 줄 아셨기 때문에 참으셨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참으심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자신을 희생하면서 헌신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 보신 일은 있으십니까?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그것으로 주님을 섬겨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신 것입니다.
만약에 아직 그런 일이 없으셨다면 이 시간에 한번 결심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3.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 고난당하기를 자처하신 것은 물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목적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본을 받아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만 받아 누리려는 사람이 있고 한 종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만 받아 누려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불쌍한 인생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서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도 모르고 세상을 아무렇게나 사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타고 없어질 이 세상의 재물 좀 있다고 떵떵거리면서 교만하게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공부 좀 했다고 세상의 이치를 좀 안다고 과학이 어떻다느니 철학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는 철딱서니 없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자녀들 공부 너무 많이 시키지 마세요.
소위 인류대학이라고 하는데 못 보내서 안달나지 마세요.
공부 좀 많이 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출세를 하면 교회에 잘 안 다닐 확률 100%입니다.
바른 물질관을 가지지 못했으면 돈 벌려고 애쓰지 마세요.
떼돈을 번다면 타락할 확률 100%입니다.
부자가 되면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확률 100%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도 많은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것을 받아서 누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만 받아서 누린다고 해서 미워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많이 받아서 마음껏 누리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만 살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좋은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모진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렇게만 살아도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고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 고난을 마다하고 영광만 받으면서 살겠습니까?
저는 한국교회의 일부 타락한 목사들을 보면서 정말로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천국을 믿는 사람들인지 의심이 갑니다.
예수님 팔아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면서 막상 예수님을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의 길을 따라오려고 하지 않고 영광의 길로만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도 고난의 길을 가기를 싫어합니다.
축복이나 받으려고 하고 출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이나 하려고 하지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일이나 본을 받으려고 하지 이렇게 고난을 받으신 것은 본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스스로 자처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본을 보이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