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6.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 06)
본문 : 막 1:21-27
제목 : 권위 있는 새 교훈.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오늘 본문은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후에 그들과 같이 가버나움이라는 곳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작은 도시였지만 상업이 발달하고 세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부터 성전이 없어지자 성전을 대신해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공부하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오늘날의 교회당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교 지도자들 특별히 성경을 기록하고 가르치는 서기관들에게 많은 말씀을 듣고 배웠는데 그들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유대인들이 놀라서 서로에게 묻고 이야기하기를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권위 있는 새 교훈”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왜 그들이 놀랐으며 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서기관들과 같지 않음일러라
본문 21-22절에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성전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가르침인데 그 다른 가르침을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주석가들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서기관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했는지를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서기관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차이점
(1) 서기관은 사람들의 말로 가르쳤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당시의 회당에서 서기관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 놓고 그 말씀의 뜻을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서기관들이 구약성경 말씀은 줄줄이 외우듯이 잘 알았지만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읽어 놓기는 했지만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본문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과 다르게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이 차이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가르치는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철학이나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회당의 서기관들처럼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고 성경을 읽고 공부를 하지만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살피기보다는 사람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 권위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잔소리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웃기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면 좋고 짧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의 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2) 서기관들은 하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그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잘 살고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사느냐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죄에 대한 문제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까지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강단의 말씀이 권위를 잃은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주제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산다고 해도 별로 해결책이 없는 막연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산다고 해도 그저 짧은 세월 잠시 동안 잘살 뿐입니다. 그것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비교적 남보다 조금 잘 살 뿐이지 괴롭고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다 다가옵니다.
세상에서 좋은 일 하면서 바르게 산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선한 일일 뿐입니다. 악한 세력이 세상을 장악하고 나 자신 속에도 그런 악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철학이나 도덕적인 교훈은 조금 유익이 있기는 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낙원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다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신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 서기관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쳤으나 예수님은 듣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듣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가르쳤습니다. 자기가 잘난 척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가르쳤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위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은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2)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일개 천한 나사렛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도 나사렛의 천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엄청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안 사람 중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회개를 외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 중요한 것을 놔두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가르치니까 그 소중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도 않습니다. 하잘것없는 세상일에 매달리다가 그렇게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본문 27절에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을 하니까 더러운 귀신도 그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외쳤습니다.
22절에서 26절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그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마침 그곳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스스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지도 않으셨는데 귀신 스스로가 예수님을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 귀신이 하는 소리를 2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배반한 사탄의 졸개들을 말합니다. 귀신은 귀신같이 잘 압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도 알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줄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신 줄 아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나를 멸하려고 오셨느냐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사탄의 종이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탄의 세력을 멸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귀신 그것도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거기서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귀신은 대항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귀신도 쩔쩔매면서 순종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신도 쩔쩔매면서 순종하는 그 권위 있는 말씀에 우리도 순종하고 따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당시처럼 그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기 위해서 마침 거기 있는 사람에게만 그 시대에만 사람에게 왔는가 하는 것은 신학자에 따라서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
신비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오기도 하고 기도해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한다고 믿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그런 더러운 귀신은 당시에만 특별히 나타났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지금도 예수님 당시의 그런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 분열증 정도로 생각하고 예수님 당시와 같이 귀신이 들어오고 들어온 귀신을 쫓아내고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더러운 귀신은 몹시 나쁜 귀신으로 사람에게 들어와서 사람의 정신을 제어하고 괴롭히는 그런 귀신을 말합니다. 그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괴롭히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귀신은 옛날 귀신과 같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많이 진보되었습니다. 옛날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괴롭히고 이상한 행동을 하게 했지만 오늘날의 귀신은 아주 똑똑하게 행동합니다.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을 주고 유혹해서 타락에 빠지게 합니다. 술이나 마약처럼 처음에는 아주 기분 좋게 해주다가 나중에 중독에 빠지게 하고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적당히 죄짓게 만들고 적당히 욕심을 챙기고 기분 좋게 해주다가 그로 인해서 완전히 죄에 빠져서 살게 만들고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만들고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다 귀신들린 사람들입니다. 사탄이 그 마음을 장악해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죄를 지으면서 살게 합니다.
귀신의 역사가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도 못하지만 아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많이 지으며 나쁜 짓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귀신이 들었어도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는 사람은 귀신이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 채 귀신의 뜻을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귀신이 아닌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있던 귀신을 몰아내고 우리의 영안을 열어서 하나님을 보고 깨닫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충만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성령님이 오셨어도 충만하게 역사하시지 않는 사람은 성령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그냥 기본적인 믿음만 가지고 삽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옛날 교회 다니지 않던 시절과 똑같이 사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직도 귀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신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셨지만 오신 줄도 모르고 그냥 겨우 연약한 믿음이나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왕 성령님께서 오셨으면 내 속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 생활 잘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새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옛 교훈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새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구약은 오래된 언약 혹은 옛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은 새로운 언약 혹은 새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주로 인간이 행할 교훈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은 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복음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주로 이 세상에서 받는 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면 신약은 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옛 언약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회도 있고 새 언약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회도 있습니다. 물론 옛 언약도 결국은 오실 예수님이 중심이 될 때 새 언약과 함께 가르쳐야 할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잘 사는 복을 강조하거나 인간답게 사는 윤리 도덕을 중심으로 가르친다면 권위 없는 인간의 교훈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그 새 교훈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이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쳐야 할 핵심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의 교훈을 잘 잊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옛날 불교나 유교나 무속신앙의 가르침을 잊지 못하고 교회도 그런 종류의 종교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권위를 잃어버리고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의 하나로 전락하고 불교에서나 유교에서 받는 세상 복을 강조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종류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곳입니다.
그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그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권위 있는 가르치심이었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얻게 하는 새로운 교훈이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가르치심이었습니다.
교회도 이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같은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잘 분별하고 따르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